<19> 김유신 (상)||18세에 도법 깨우치고, 진평왕 대에서부터 5왕 시대를 거친 무신

▲ 신라 천 년의 궁성 월성에서 서쪽으로 400m 정도 떨어진 곳에 김유신 장군의 생가터로 전해지는 지역에 김유신 장군의 신도비와 신라시대 우물 재매정이 있다.
▲ 신라 천 년의 궁성 월성에서 서쪽으로 400m 정도 떨어진 곳에 김유신 장군의 생가터로 전해지는 지역에 김유신 장군의 신도비와 신라시대 우물 재매정이 있다.


김유신은 가야의 후손이면서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맹활약 했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 왕위에는 오르지 못했다. 사후에 흥무대왕으로 추증되어 왕의 칭호를 받았지만, 그를 왕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김유신은 진평왕 시대부터 김춘추와 뜻을 맞춰 끊임없는 전쟁을 치르며 신라 삼국통일에 많은 공을 남겼다. 특히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때에는 궁궐과 외곽지 전쟁터에서 무장으로 두루 맹활약을 펼쳤다.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는 데에도 김유신이 적극적인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무열왕의 아들 법민 문무왕 시대에도 장군으로 전쟁터를 누비며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선봉장이 되었다.



김유신 장군은 진평왕 대에서부터 선덕여왕, 진덕여왕, 무열왕, 문무왕까지 5왕의 옆에서나라를 지키는 충신으로 천 년이 지나도록 불세출의 영웅으로 이름을 전하고 있다.



김유신은 출생에 대한 신비, 청년기 천관녀와의 사랑, 김춘추와 인연 맺기, 비담의 난 진압, 재매정 우물설화, 매소성 전투사, 삼국통일의 길 등 수많은 이야기를 남긴 역사적 인물이다. 상·하편으로 나누어 이야기를 재구성해본다.



▲ 김유신 장군의 생가터로 보이는 건물지와 재매정, 조선시대와 고려시대 건물지가 발견된 곳이다. 신라시대 귀족의 저택으로 보이는 대규모 주택지가 확인되었다.
▲ 김유신 장군의 생가터로 보이는 건물지와 재매정, 조선시대와 고려시대 건물지가 발견된 곳이다. 신라시대 귀족의 저택으로 보이는 대규모 주택지가 확인되었다.


◆삼국유사: 김유신

무력 이간의 아들인 서현 각간 김씨의 맏아들을 유신이라 하고, 아우를 흠순이라 한다. 맏누이는 ‘보희’라 하며, 어릴 때 이름은 ‘아해’이다. 그 동생은 ‘문희’라 하며 어릴 때 이름은 ‘아지’이다.



유신공은 진평왕 17년 을묘(595)에 태어났는데 해와 달과 목, 화, 토, 금, 수 별들의 정기를 받아서 등에 칠성의 무늬가 있었으며, 또 신령스럽고 기이한 일이 많았다.



나이가 18세 되던 임신(612)에 검술을 익히고 술법을 터득하여 국선이 되었다.



이 당시 백석이란 자가 있었는데,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었으나 여러 해 동안 낭의 무리에 속해 있었다.



유신랑이 고구려와 백제를 치려고 밤낮으로 깊이 몰두하고 있을 때 백석이 그 계획을 알고 유신에게 말하기를 “청컨대 저와 공이 함께 아무도 모르게 먼저 저 나라를 정탐한 후에 일을 도모하면 어떻겠습니까?”라 했다. 유신은 기뻐하며 친히 백석을 데리고 밤에 길을 떠났다.



▲ 김유신 장군의 생가터에 태대각간 김선생 신도비와 재매정, 주춧돌과 기타 건축 부재들이 많이 남아 있다.
▲ 김유신 장군의 생가터에 태대각간 김선생 신도비와 재매정, 주춧돌과 기타 건축 부재들이 많이 남아 있다.


고개 위에서 막 쉬려고 하는데 세 여인이 나타나 “공께서는 백석을 잠시 따돌리고 숲 속으로 함께 들어가시면 그간의 내막을 말씀드리겠습니다”라 했다.



숲 속에 들어가니 낭자들이 문득 신의 모습으로 변해 “우리들은 내림, 헐례, 골화 등 세 곳의 호국신입니다. 지금 적국의 사람이 당신을 유인해 가는데도 당신은 알지 못하고 있어서 알려드리고자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하고 사라졌다.



유신공이 그 말을 듣고 놀라 쓰러졌다가 두 번 절하고, 숲 속에서 나와 골화관에 유숙하고 있는 백석에게 “지금 다른 나라에 가면서 중요한 문서를 잊고 왔으니 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 가지고 오자”라 했다.



▲ 천관사지에서 발굴된 석탑의 부재로 복원 중인 천관사지 삼층석탑. 탑신과 옥개석이 팔각형으로 경주지역에서는 유일한 팔각 이형탑이다.
▲ 천관사지에서 발굴된 석탑의 부재로 복원 중인 천관사지 삼층석탑. 탑신과 옥개석이 팔각형으로 경주지역에서는 유일한 팔각 이형탑이다.


집으로 돌아와 백석을 결박하여 고문하면서 그 내막을 다그쳐 물으니 백석이 “나는 본래 고구려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의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신라의 유신은 본래 우리나라의 점쟁이인 추남이었다고 했습니다”며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국경에 거꾸로 흐르는 물이 있어서 추남으로 하여금 점을 치게 했습니다. 추남이 “대왕의 부인이 음양의 법칙을 거슬러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라 하니 대왕이 놀라면서 괴이하게 여겼습니다.



왕비가 크게 노하여 이는 요망한 여우의 말이라고 왕에게 말씀드리면서 다시 그를 시험해 물어보고 말이 틀리면 중형에 처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한 마리의 쥐를 함 속에 감추어 두고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고 물었습니다. 추남이 말씀드리기를 “이는 틀림없이 쥐인데 여덟마리가 있습니다”라 하자, 그 말이 틀렸다 하여 죄를 물어 목을 베려고 하니, 추남이 맹세하기를 “내가 죽은 후 대장이 되어 반드시 고구려를 멸하리라”고 했습니다.



즉시 목을 베어 죽이고 쥐의 배를 갈라보니 새끼 일곱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제야 앞에 한 말이 맞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날 밤 대왕은 추남이 신라 서현공 부인의 품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고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니, 모두들 말하기를 “추남이 맹세하고 죽더니 이것이 과연 사실인가 보옵니다”라고 해서 나를 여기에 보내어 당신을 유인할 계획이었습니다”라 했다.



유신은 즉시 백석을 처형하고, 온갖 음식물을 갖추어 삼신에게 제사를 지내니 삼신 모두가 사람의 몸으로 나타나 제사를 받았다.



▲ 김유신 장군은 죽어서 흥무대왕으로 추증되었다. 아울러 그의 묘도 새로 복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왕릉과 같이 호석에는 12지신상이 두텁게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 김유신 장군은 죽어서 흥무대왕으로 추증되었다. 아울러 그의 묘도 새로 복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왕릉과 같이 호석에는 12지신상이 두텁게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김씨의 문중 어른 되는 재매부인이 죽으니 청연의 위 골짜기에 장사지냈다. 그래서 그 골짜기 이름을 ‘재매곡’이라 하며 매년 봄철에 온 집안의 남녀들이 그 골짜기의 남쪽 개울에 모여서 잔치를 했다.



이 때면 백화가 만발하고 송화가 골짜기 숲 속에 가득했다. 계곡 어귀에 암자를 짓고 이름도 경치에 따라 ‘송화방’이라고 했다. 이것이 전해져서 소원을 비는 절로 삼았다.



54대 경명왕 때에 유신공을 추봉하여 ‘흥무대왕’이라 했다. 능은 서산 모지사의 북쪽이며 동쪽으로 향해 뻗은 봉우리에 있다.



▲ 신라시대 우물로 김유신 장군의 생가터에 보존되고 있다. 깊이 5.7m, 보기 드물게 화강암으로 쌓아올린 사각형 우물로 보존되고 있는 재매정이다.
▲ 신라시대 우물로 김유신 장군의 생가터에 보존되고 있다. 깊이 5.7m, 보기 드물게 화강암으로 쌓아올린 사각형 우물로 보존되고 있는 재매정이다.


◆흔적

△재매정: 재매정은 김유신 장군의 생가로 알려진 건물터에 남아 있는 신라시대 우물이다. 경주시 교동에 있는 우물로 사적 제246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사적지는 5천481㎡로 김유신 장군의 생가터로 추정된다. 신라 최초의 국가사찰 흥륜사지와 신라 천 년 궁궐 월성의 중간에 위치해 있다. 월성에서 약 400m 거리다.



우물은 1.5m 가량의 화강암 기둥으로 위를 사각형으로 둘러싸고, 깊이는 5.7m 정도다. 우물 옆에는 신라개국공 태대각간 김유신 유허비와 비각이 1872년에 세워져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선덕여왕 당시 김유신이 상장군이 되어 성열성과 동화성 등의 일곱 성을 공격해 백제군을 크게 무찌르고 돌아왔다.



그러나 왕을 배알하기도 전에 백제의 대군이 신라의 매리포성을 침공한다는 급보를 받고, 김유신은 가족도 만나보지 못한 채 바로 말머리를 돌려 출정했다.



이때 장군은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 앞을 지나면서 돌아보지도 않고 가다가, 부하에게 “집에 가서 물을 떠오라”고 명령해 물을 마셔 보고 “우리 집 물맛이 아직도 옛날 그대로구나!”하고 그냥 전쟁터로 길을 떠났다.



이를 보고 모든 군사들이 “대장군도 이와 같은데 우리들이야 어찌 가족들과 이별함을 한탄하리요”라면서 기꺼이 싸움터로 나갔다고 한다.



이 싸움에서 김유신 장군의 군사는 백제군을 패주시키고, 2천여 명을 베어죽이거나 사로잡았다.





▲ 김유신 장군 청년기에 사랑을 나누었던 것으로 전해지는 천관녀가 살았던 곳에 장군이 늘그막에 그녀를 기리기 위해 절을 지어 천관사라 불렀다. 석탑과 기초석 등의 석재가 남아 있는 천관사지. 주변 정비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 김유신 장군 청년기에 사랑을 나누었던 것으로 전해지는 천관녀가 살았던 곳에 장군이 늘그막에 그녀를 기리기 위해 절을 지어 천관사라 불렀다. 석탑과 기초석 등의 석재가 남아 있는 천관사지. 주변 정비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천관사지: 천관사지는 김유신의 사랑과 효, 충성심에 대한 이야기가 설화처럼 전해지는 곳이다.



천관사는 김유신 장군이 첫사랑 천관을 못 잊어 늘그막에 그녀를 기리기 위해 천관의 집터에 지은 절이다. 천관사는 월성에서 남산 방향으로 남천을 건너 500여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최근 경주시가 발굴에서 기와조각과 석탑 부재, 건물지 등을 확인하고, 절 주변 정비사업과 함께 3층석탑을 추정 복원하고 있다.



복원하는 천관사지 삼층석탑은 탑신과 옥개석이 팔각형으로 경주지역에서는 유일한 형식이다. 새로운 볼거리로 탐방객들을 불러 모을 것으로 기대된다.





▲ 경주시는 관광객들이 천관사지를 탐방하기 쉽도록 탐방로를 말끔하게 정비해두고 있다.
▲ 경주시는 관광객들이 천관사지를 탐방하기 쉽도록 탐방로를 말끔하게 정비해두고 있다.


△단석산: 단석산은 해발 827m 높이로 경주 일대에서는 가장 높은 봉우리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풍광도 아름다울 뿐 아니라, 국보로 지정된 신선사마애불상군 문화유적이 신라시대의 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내밀하게 전해준다.



특히 단석산 정상에는 김유신 장군이 수도하면서 단칼에 베었다는 큰 항아리 크기의 화강암이 가운데가 두부를 자르듯 양단되어 오래된 설화의 흔적으로 남아 신비함을 자아낸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신도 김유신

김유신은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불렸다. 몸에 북두칠성을 타고 태어나면서부터 범상하지 않은 재주를 보였다. 글공부는 한 번 들으면 잊어버리지 않고, 활용하는 응용력도 뛰어나 주변 사람들이 깜짝깜짝 놀랐다.



유신은 신체발육이 빨라 10세에 벌써 성인의 몸보다 우람하게 성장했다.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집안의 심법의 뜻을 이때 이미 오의를 깨우치고 깊이 수련에 정진했다.

15세에 몸은 장수의 튼튼한 체력으로 다듬어 지고, 집안의 도법은 십성의 경지에 이르렀다.



김유신은 16세에 화랑이 되어 처음 전쟁터에 나아갔다. 물러서는 법 없이 적을 베어 넘겼지만, 중과부적으로 장수의 후퇴 명령에 따라 많은 아군을 잃고 패퇴하는 아픔을 겪었다.

유신은 동료를 지키기 위해서는 더 많은 무공을 터득해야겠다는 것을 깨닫고 갑옷을 벗어던지고 단석산으로 들어갔다.



▲ 신라시대 조각된 대형 석불이 신선사 서쪽 암벽 동, 서, 남쪽에 새겨져 있다.
▲ 신라시대 조각된 대형 석불이 신선사 서쪽 암벽 동, 서, 남쪽에 새겨져 있다.


2년간 암자에서 무수히 칼을 휘두르며 도법과 검법, 궁술 연마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진했다.



또한 쉬는 시간 없이 묵상하면서 정신수양과 기도에 매진했다. 불과 2년의 시간이었지만 이미 터득하고 있던 심법과 그의 타고난 신선과 같은 체질은 놀라운 정진을 보게 했다.



일반 뛰어난 무사가 5시간 걸리는 단석산 둘레길을 1시간이 안되어서 돌아오고도 호흡이 거칠어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가 한 번 칼을 휘두르고 칼집에 도를 갈무리하고 난 다음에야 풀이든 나무든 우수수 쓰러졌다.



유신이 하산을 서두르던 그때 그의 앞 길을 막아서는 백발의 노인이 있었다. 김유신이 완력으로 한 시간이 넘도록 밀어내어도 한 발자국도 비켜나게 하지 못했다. 그제야 김유신이 노인 앞에 엎드려 절하고 지도를 당부하자 백발노인이 보검과 비법을 새긴 양가죽을 건네면서 옳은 일을 위해 힘을 쓸 것을 당부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유신은 다시 양가죽에 새겨진 비법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 비법은 지금까지 유신이 알고 있던 수련법에 정신의 힘을 더하는 방법이었다. 천기의 심신을 타고 태어난 유신은 불과 한 달 만에 그 뜻을 깨우쳤다.



▲ 김유신 장군이 18세에 득도하면서 신선으로부터 하사받은 보검으로 단칼에 베었다는 단석산 정상의 단석.
▲ 김유신 장군이 18세에 득도하면서 신선으로부터 하사받은 보검으로 단칼에 베었다는 단석산 정상의 단석.


도인이 전해준 비법에 따라 기운을 일으키자 몸 안에서 힘이 폭주하는 느낌이 일었다. 가만히 일어나 정신을 집중하면서 힘을 한 곳으로 갈무리 했다.

조용히 보검을 빼어들고 정상의 바위 앞에서 정신을 가다듬고 위에서 아래로 칼을 내리 그었다. 수억 년 한 덩어리로 뭉쳐 단석산 정상을 누르고 있던 화강암이 두부처럼 싹둑 양단되면서 쩍 갈라졌다.



유신은 백발노인이 사라진 북쪽을 향해 세 번 절하고 “백성들의 편안한 삶을 위해 칼을 들겠습니다”라 다짐하듯 말하고 하산했다. 이때 유신의 나이 불과 18세였다. 무예의 정점에 올라 전장에 나서니 백전백승하는 명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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