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 짓고, 손을 건네는 행위,/ 그 본질은 무엇일까/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순간에도/ 홀로 고립되었다고 느낀 적은 없는지?/ 사람이 사람으로부터/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듯/ 첫번째 심문에서 피고에게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는/ 엄정한 법정에 끌려나온 듯/ 과연 내가 타인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을까?/ (중략)/ 그럴듯하게 얼버무리면서/ 정작 답변은 회피하고/ 손해라도 입을까 겁에 질려/ 솔직한 고백 대신 번지르르 농담이나 늘어놓는 주제에/ 참다운 우정이 존재하지 않는/ 냉혹한 세상을 탓하기만 할 뿐,/ 우정도 사랑처럼/ 함께 만들어야 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중략)/ 탁자 위에 놓인 유리컵 따위엔/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법/ 누군가의 부주의로 인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기 전까지는/ 사람에게 품고 있는 사람의 마음/ 과연 생각처럼 단순하고 명확한 것일까?
- 시집 『끝과 시작』 (문학과지성사, 2007)
벗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많은 금언들이 있다. 애디슨은 “진정한 행복은 처음엔 자신의 삶을 즐기는데서 오지만, 그 다음엔 몇몇 선택된 친구와의 우정과 대화에서 온다.”고 하였다. 오프라 윈프리는 “당신과 리무진을 함께 타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겠지만, 정작 당신이 원하는 사람은 리무진이 고장 났을 때 같이 버스를 타 줄 사람”이라고 했다. 아무 일 없을 때는 잘 몰랐던 사람의 성격도 다급한 위기 상황 아래서 그 성격이 쉽게 노출되기도 한다. 흔히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고 하지만 꼭 겪어봐야 그 심정을 아는 건 아니다.
어제는 모처럼 친구와 종로에서 만나 둘이서 소주 4병을 마셨다. 예전 같으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과음의 수준이다.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다가 다른 사람에게 한 번도 털어놓지 않았던 이야기를 해버렸다. 결국 내 ‘우울증’으로 화제가 옮겨갔고 친구의 ‘실패한 넥타이’ 이야기까지 들었다. 우리 민족은 유난히 남의 슬픔을 같이 슬퍼할 줄 알고 기쁨을 함께 나누는 기질을 지녔다고 한다. 그래서 한도 흥도 울분도 많다. 그것은 인지상정이며 다른 특별한 정신적 에너지가 필요하지는 않다. 그 가동이 잘 되는 사람과 안 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내가 없어진 자리에 대상에 대한 사랑이 채워지면서 공감은 완성된다. 꼭 우정이 아닌 사람의 도리라 해도 마찬가지다. 친구의 아픔과 우울을 함께 공감하고, 가슴으로 관통시켜 그를 고립시키지 않으려는 노력이 더해질 때 ‘진정한 행복’은 찾아오리라. 이웃이 어려움을 당할 때 외면하거나 실실 꽁무니를 빼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고통을 나누어 가짐이 참된 의리이며 진정한 친구가 아닐까? 이는 곧 나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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