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난극복과 편 가르기

윤일현

지성교육문화센터이사장

그리스 신화와 구약성경의 창조론은 태초에 혼돈(chaos, 무질서)에서 이 세상(cosmos, 질서)이 만들어졌다고 설명한다. 그리스인들은 측량할 수 있고 규칙적이고 질서 정연한 사물들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질서하고 불규칙한 것들은 혼돈스럽고 이해할 수 없고 이치에 합당하지 않아 선할 수도, 아름다울 수도 없었다. 신은 혼란을 싫어하고 질서를 좋아하기 때문에 신이 만든 모든 것은 질서 있게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서구의 과학혁명은 신에 대한 신뢰와 믿음에서 시작되었고, 신의 질서를 찾으려는 노력이 서양과학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이성이라는 짧은 공식에 우주의 일반 원리를 넣으려고 했다. 뉴턴의 기계론적 세계관은 이런 생각의 정점이었다. 세계는 예측 가능한 시계와 같은 것이었다.

과학적 성과가 쌓이면서 고전물리학 이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이 많이 나타났다. 이성과 기존의 과학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처음에는 실험오차로 간주하여 무시하거나 통계학을 이용하여 감추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려는 이론들이 속속 등장했다. 양자 물리학의 불확정론, 카오스 이론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이론들은 ‘예측 가능한 과학’이 아니라 원인을 알 수 있고, 과정을 이해할 수 있지만, 결과는 알 수 없는 ‘설명만 가능한 과학’을 다룬다. 일기예보가 아무리 신뢰할 수 있다고 해도 내일 우산을 가져갈지 말지를 자신 있게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오늘의 국제관계나 정치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외교문제는 주전론과 주화론 같은 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다. 이분법은 객관적인 대의와 명분, 냉정한 손익계산보다는 적개심과 분노로 상대에 대한 혐오감과 흠집 내기를 부추기는데 편리하게 이용된다. 편 가르기는 지지층을 결속하는 효과는 있지만 치유할 수 없는 후유증과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일본의 수출 규제에 대한 정치권과 언론의 대응 방법이 너무 단선적이고 이분법적이다. 정치권과 인터넷, 일부 언론을 도배하고 있는 용어들을 보라. 토착왜구, 토착빨갱이, 종북좌빨, 수구골통, 친일, 매국 같은 용어에는 상대에 대한 배려나 전략적 판단 따위는 아예 없다. 국난극복을 위해 대동단결하자는 간절하고 절박한 호소도 없다. 이런 용어 속에는 한 쪽이 죽어 없어져야 속이 시원해지는 사생결단의 저주와 혐오만 있다. 우리끼리 이렇게 분열되어 내부 총질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외부의 적을 이길 수 있겠는가. 토착 왜구든 빨갱이든 우리 모두는 서로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운명 공동체이다. 격렬하게 논쟁하고 싸우더라도 예의를 지키고 막말만은 자제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통합의 정치력이 간절하게 필요한 때이다. 세상만사를 예측 가능한 시계라는 틀로 설명할 수 없듯이, 오늘 우리가 처한 국난 수준의 이 위기도 이분법적 편 가르기로는 극복할 수가 없다. 여러 상수와 변수가 복합적으로 얽혀있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일본 제품 구매와 일본 여행을 자제해야 한다. 전 국민적 분노를 일본 국민과 일본 정부가 구체적으로 체감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렇다고 정부가 앞장서서 외부의 적과 내부를 향해 막말이나 하며 본질 외적인 소모전을 조장해서는 안 된다. 일본과 국교를 단절하겠다는 것인가. 국민을 토착왜구와 토착빨갱이로 나누어 나라를 분리 독립시키자는 것인가. 지금 관련기업과 여행업계, 일본 상품을 취급하는 국민들은 엄청난 경제적 손실과 정신적 고통을 겪으며 문제 해결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정부는 맹목적인 애국심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당장 피해를 입고 있는 그들을 보듬어 주며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인내하자고 호소해야 한다.

실제 전하고자 하는 속마음이 어떻든 간에 조국 수석처럼 친일과 매국으로 편 가르기하며 죽창가를 올리거나, 김문수 전 경기지사처럼 ‘친일이 더 낫다’는 뜬금없이 황당한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 다시 강조하지만 일본에 대한 분노의 표현은 민간이 주도 하도록 두고 정부와 정치권은 외교적 수사를 생각하며 품위를 유지한 채 실효성 있는 전략 마련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게 다수 국민의 명령임을 알고 있는가.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