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결혼식 / 최정례

발행일 2019-08-05 16:09:31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내일은 결혼식/ 최정례

신발을 나란히 벗어놓으면/ 한 짝은 엎어져 딴 생각을 한다/ 별들의 뒤에서 어둠을 지키다/ 번쩍 스쳐 지나는 번개처럼// 축제의 유리잔 부딪치다/ 가느다란 실금/ 엉뚱한 곳으로 방향을 트는 것처럼// 여행 계획을 세우고 예약을 하고 짐을 싸고 나면/ 병이 나거나 여권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가기 싫은 마음이/ 가고 싶은 마음을 끌어안고서/ 태풍이 온다// 태풍이 오고야 만다/ 고요하게 자기 눈 속에 난폭함을/ 숨겨두고/ 내일은 결혼식인데 하필 오늘/ 결혼하기 싫은 마음이 고개를 쳐드는 것처럼

- 2017 현대문학상 수상시집(현대문학, 2017)

난데없이 신발을 잃어버리고 헤매는 꿈을 꾸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인관계의 오해나 구설로 고통을 받고 있거나 진행 중인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해몽이다. 오랫동안 겪고 있는 일들이 은유의 기재로 꿈에 나타난 것이다. ‘신발을 나란히 벗어놓으면’ 꼭 ‘한 짝은 엎어져 딴 생각을’ 한다. 여행가방을 다 싸놓고 나서 가기 싫은 마음에 미적거리다 차를 놓쳐버리는 기분이랄까. 강한 태풍이 몰아쳐 비행기가 뜨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랄까.

지난 2일 밤 EBS금요극장에서 방송한 <졸업>은 봤던 영화지만 다시 보았다. ‘졸업’은 현대를 사는 미국 젊은이들의 고뇌가 깃든 작품으로 불안한 미래를 앞둔 주인공 벤자민의 방황을 통해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60년대 후반의 대표적인 할리우드 작품이다. 그런데 보다보니 71년 국내 개봉된 이 영화를 내가 언제 어디서 봤는지 통 기억에 없다. 대강의 스토리는 안다지만 풀타임으로 봤는지조차 분명치 않았다. ‘사이먼&가펑클’의 음악과 함께 라스트신만 기억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영화의 내용은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얄궂었다. ‘벤’이 여친 ‘엘레인’의 엄마 ‘로빈슨 부인’하고의 불륜 장면이 충격적인데, 내 기억과 일치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가 엘레인의 엄마가 아니라 친척으로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함께 벤이 로빈슨부인의 유혹에 일방적으로 넘어간 것만이 아니라 스스로 머시멜로의 달콤함에 빠져든 사실도 새삼 알았다. 벤이 대학 졸업이후의 공허감을 로빈슨부인에게서 채웠던 것인데 한마디로 이런 내용인 줄은 몰랐다.

기억이 왜곡되어 있었던 것이다. 다만 이제 알게 된 사실 하나는 당시 우리사회 정서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한 남자와 모녀가 잔다는 엄청난 막장 내용인지라 심의 과정에서 이모와 조카로 자막을 고쳐서 상영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얼버무리고 문제 장면은 가위질을 해놓았으니 봐도 제대로 보지 못했음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그건 그렇고 영화 ‘졸업’의 엘레인에게도 ‘내일은 결혼식인데 하필 오늘 결혼하기 싫은 마음이 고개를 쳐들’었을까. 그만큼 원치 않는 결혼이었고 벤을 깊게 사랑했던 걸까. 그래서 식장을 뛰쳐나올 수 있었던 것일까.

그저 빤한 로맨틱 영화라 생각하면 그리 봐줄 수 있겠으나 영화로 인해 점화된 내 청춘의 나날을 떠올리면 쓸쓸함과 씁쓰레함만 가득해진다. 기어이 영화는 몹쓸 내 젊은 날의 기억에 불을 붙이고 만다. 떼밀리고 떼밀려 원치 않는 여자와 약혼을 하고 내일이면 청첩장이 나온다는데, 멀리서 찾아온 그녀는 “우리 다 벗어던지고 함께 도망가 버릴까? 그러자 우리!” 그 말을 들었더라면, 그 용기가 발휘되었더라면 지금쯤 내 삶은 해피엔딩으로 치달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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