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척의 배와 이순신

발행일 2019-08-06 14:37:57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오철환 객원논설위원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갈등이 복잡하게 얽혀 돌아가는 상황에서 일본은 대한민국과 경제전쟁을 불사할 태세다. 국난이란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열두 척의 배와 이순신’을 끌어대는 것만 봐도 우리가 정말 국난에 처하긴 한 모양이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 해법을 찾고자 한다면 똑바로 알고 제대로 배울 필요가 있다.

비교·비유도 제대로 해야 한다. 비교·비유는 복잡한 사안의 정곡을 찔러 문외한의 이해를 돕기도 하지만 그 본질을 흐리기도 한다.

무릇 만사가 대강 그렇듯이 비교·비유도 최소한의 한계는 존재한다. 전혀 다른 상황을 견강부회로 끌어와 얼치기로 비교·비유하게 되면 선량한 사람을 속이려 한다는 의심을 받는다.

지금 상황에서 열두 척의 배를 거론하는 의도는 대충 짐작된다. 최근 상황과 열두 척만 남았던 임진왜란 당시의 위기상황을 유사하게 본 모양이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자신을 이순신으로 생각한 듯하다. 의병을 일으켜 죽창으로 왜병을 물리치자고 선동한 사람도 있다. 언뜻 보면 그럴싸해 보인다. 그렇지만 꼼꼼히 따져보면 얼토당토않다. 후세 사가들에게 창피당하기 십상이다.

1597년, 명과 왜의 강화회담이 결렬되자 왜군이 다시 쳐들어왔다. 이순신은 백의종군하고 있었다. 선조의 무지한 부산포 진격 명령에 불응했다는 이유였다. 원균이 후임 수군통제사였다.

원균의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대패하고 겨우 열두 척의 병선만 남았다. 원균은 전사하고 병사들은 흩어졌다. 열두 척의 배는 누란의 위기에 고립무원, 그런 상황이다.

선조는 이순신을 다시 수군통제사에 재임용했다. 이순신은 열두 척의 병선과 빈약한 병력을 수습해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맞서 싸웠다. 무려 31척을 쳐부수고 대승했다. 명량해전은 조선 수군을 재정비하는 역할을 한 중요한 싸움이었다. 이를 기회로 장병들이 다시 모여들었고, 군진의 위용도 다시 갖춰졌다. 단시간에 수군을 재정비하고, 제해권을 장악했다. 이순신이 나라를 구한 영웅담이다.

열두 척의 배만 남도록 조선 수군을 위기로 몬 사람은 선조를 위시한 위정자였다. 지금의 위기상황에 열두 척의 배를 대입하려고 한다면 누가 어떻게 이 위기상황을 조성했는지 따져봐야 한다.

대북제재 완화 시도와 사드 배치에 대한 미온적 조치 등 일련의 친중연북 정책으로 한미동맹을 균열시키고, 위안부 합의 파기와 징용 배상 판결로 일본과의 신뢰 관계를 무너뜨렸다. 게다가 중국의 몽니에 단호하게 대응하지 못해 국제적 놀림감이 된 것도 상황을 악화시켰다. 위정자가 지금의 국난을 불러들인 면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 장본인이 ‘열두 척과 이순신’을 운운하는 것은 상황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선조나 원균이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있으니 승리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는 상황이다.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통제 불가능한 외생변수는 그냥 두고 통제 가능한 내생변수를 제대로 관리하는 것이 승리의 요체다. 이순신의 등용이 그것이다.

지금 상황을 열두 척에 대비했다면 선조와 원균은 그 잘못을 즉각 인정하고 이순신을 다시 불러오는 일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지금의 국난을 수습할 이순신을 찾는 일이 사안의 핵심이다.

이승만과 박정희를 조커로 써먹을 통찰력과 심미안이 필요하다. 혼란한 해방정국에서 자유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과 가난한 나라에서 부국강병한 나라를 만들어낸 박정희, 이 두 분은 국난 상황에 내놓을 조커라 할만하다. 지금 이순신으로 내세워도 전혀 손색이 없는 불세출의 위인이다. 열두 척 상황에 이순신이 필요하다면 이승만의 건국 정신과 박정희의 부국강병 정신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답이 나온다.

왕이 무능하고 군이 무력해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서고 백성이 도탄에 빠져 있을 때, 나라와 백성을 구하고자 분연히 일어선 민병이 의병이다. 죽창은 병기가 없던 백성이 손쉽게 준비할 수 있는 조잡한 무기다.

죽창 의병은 그 정신은 높이 살 만하지만 전력은 아마추어 수준이다. 죽창 의병이 승전했다면 테러와 게릴라전을 응용한 변칙적인 전투를 통해서일 것이다.

의병이 백성의 정의로운 기백을 보여준 것은 사실이지만 의병만으로 국난을 극복한 예는 드물다. 의병이 필요할 정도로 나라가 개판이라면 책임 있는 위정자는 의병과 죽창을 거론할 자격조차 없다. 지금은 의병이 봉기할 성질의 국난도 아니다. 부끄러운 일이다. 시비지심이 없다면 최소한 수오지심은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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