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일반

하늘이 내린 ‘유신’ 앞세운 왕권 향한 치밀한 전략 역사에 최후의 승자로 남다

<23> 태종 춘추공(하)
무열왕 백제 멸망시켜 복수하고, 김유신과 우호 두텁게 맺어 아들에게 왕위 안전하게 이양

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 장군, 문무왕 등 신라 삼국통일 주역을 모신 통일전 앞에 화랑들의 정신을 추념하기 위한 화랑지에 화랑정을 지었다. 화랑지에는 연꽃이 피고, 잉어들이 떼지어 다니는 모습이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보여 장관이다.


태종 무열왕은 신라에서 여러 가지 기록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성골이 아닌 진골로서 최초의 신라왕이 되었다. 죽어서도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신라왕릉 중에서 귀부가 있는 비석이 최초로 나타난 왕릉이기도 하다. 비석의 몸돌은 사라지고 없지만, 남은 귀부와 이수는 최고의 예술적인 가치를 자랑하며 국보로 지정됐다.

김춘추는 당나라의 힘을 얻어 결국 백제를 멸망에 이르게 했다. 18년 만에 그의 딸과 사위에 대한 원한을 갚고, 신라의 삼국통일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김춘추는 누구보다 두뇌 회전이 빠르고 사리가 깊었다. 먼 앞날을 예측하는 눈도 밝아 전쟁에 대한 전술전략도 훌륭하다는 평가를 들었다.

김춘추는 51세에 왕위에 올라 백제 의자왕의 무릎을 꿇리며 삼국통일의 기초를 마련하고 고구려를 공격하는 한편, 후계 구도를 안정적으로 가져가기 위해 김유신과의 이중적 혈연관계를 맺기도 했다.

김춘추가 백제를 치기 위해 당나라를 방문해 군사를 빌려줄 것을 간청하며 여러가지 제안을 했다. 그중 당나라 복식을 신라조정에 도입할 것을 약속하고 입은 당시의 모습.


당나라와의 협력관계 유지를 위해 둘째 아들 인문을 당나라 황실 내부 깊숙하게 심어두었다. 김인문은 당의 정보를 신라에 전달하는 한편, 당나라가 신라의 우방으로 남을 수 있도록 상당한 역할을 했다.

삼국유사는 태종 춘추공에 대한 기록을 길게 늘여 소개하고 있다. 지면 관계상 단락을 나누어 간략하게 줄여 소개한다.

◆삼국유사: 태종 춘추공(3)

당나라 고종은 백제가 멸망 이후에도 군사를 일으켜 신라와 전쟁을 일삼자 문무왕 5년 665년에 장군 유인원을 보내 신라와 백제가 서로 형제의 의를 맺어 화친하고, 영원히 당나라에 복종한다고 맹세하게 했다.

668년 당나라 군사가 평양에 주둔하며 신라에 군수물자를 요청했다. 문무왕이 적군 진영 깊숙이 있는 당나라 군사에게 누가 수송의 위험한 일을 할 수 있을까 걱정하자, 김유신 장군이 나서 군량 2만 섬을 수송하고 돌아왔다.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과 박물관 전경. 정림사지 5층석탑에는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백제고기’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고 그 밑에 강물이 있다. 의자왕과 여러 후궁들은 최후를 면치 못할 것을 알고 서로 말하기를 “차라리 자살을 할 지언정 남의 손에 의해서 죽지는 않겠다” 하면서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한다.

백화정 정자에서 내려다 본 백마강의 풍경.


당나라 소정방이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쳐서 평정하고 또 신라를 칠 계획으로 머물고 있었다.

유신이 그 음모를 알아차리고 당나라 군사에게 짐이라는 독약을 먹여 모조리 죽여 구덩이에 묻어버렸다. 지금 상주 경계에 당교가 있다. 이곳이 그들을 묻은 땅이다.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은 백제가 멸망한 곳에 위치해 있다.


당나라 군사가 백제를 평정하고 돌아간 후, 신라왕이 여러 장수에게 명령을 내려 백제의 남은 적을 추격하여 잡게 했다.

군사가 주둔한 한산성에 고구려와 말갈의 두 나라 군사가 와서 성을 포위해서 마주 싸웠으나 포위를 풀지 못하더니 5월11일부터 6월22일 사이에 신라군사들이 매우 위급하게 되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여 묻기를 “어떻게 할 계책이 없을까?” 하고 망설이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유신이 “형세가 급하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가 없고, 신의 술법으로만 구할 수가 있습니다”라 했다.

이에 성부산에 제단을 설치하고 신술을 빌었더니, 갑자기 큰 항아리 만한 불빛이 번쩍거리며 제단 위로 나와 즉시 별처럼 북쪽으로 날아갔다.

백제가 무열왕의 공격을 받아 멸망에 이르는 위기에 처하자 삼천궁녀들이 스스로 백마강으로 뛰어내려 죽음을 택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에 세워진 정자 백화정.
적들이 공격을 하려고 하자 갑자기 번쩍번쩍하는 불빛이 남쪽 하늘 끝으로부터 오더니 벼락이 되어 돌을 쏘는 포 30여 곳을 때려 부수었다. 적군의 활과 화살 그리고 창칼들은 주판알이 흩어지듯 산산이 부서지고 병사들은 모두 땅에 쓰러졌다.

태종이 처음 왕위에 오르니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고 다리가 여덟 개나 되는 멧돼지를 바치는 자가 있었다. 해석하는 사람이 “이것은 필시 천하를 통일 할 좋은 징조입니다”라 했다.

태종 무열왕 때 처음으로 중국의 의관과 아홀을 쓰게 되었다. 바로 자장법사가 당나라 황제에게 청하여 가지고 와서 전한 것이다.

백마강이 흐르는 언덕에 삼천궁녀들이 떨어지는 꽃잎처럼 뛰어 내렸다 하여 ‘낙화암’이라 바위이름을 짓고, 정자 이름을 ‘백화정’이라 부른다.


신문왕 때에 당나라 고종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짐의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천하를 통일하셨다. 그래서 태종 황제로 하였는 데 너희 신라는 바다 밖의 작은 나라로서 태종이라는 왕의 호칭을 사용하여 천자의 이름을 범한 것은 불충하니 빨리 호칭을 고칠 것이다”라 했다.

김춘추의 둘째 아들 김인문은 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당나라로 들어가 고종황제에게 군사를 빌려 앞장군이 되어 백제를 치는데 성공했다. 그는 끝내 당나라에서 죽음을 맞았다. 사후에 아버지의 무덤 앞으로 시신을 가져와 장례를 치렀다. 김인문의 비석 일부가 발견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신라왕이 “신라는 비록 작은 나라이나 거룩한 신하인 김유신을 얻어 삼국을 통일하였으므로 태종으로 한 것이오”라 했다.

당나라 황제가 그가 태자로 있을 때 ‘하늘에서 외치기를 33천의 한 분이 신라에 내려와 유신이 되었다’는 기록을 책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을 꺼내다 보고 놀랍고 두려워 다시 사신을 보내 태종이라는 칭호를 고치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김춘추의 권력 이양

김춘추는 선덕여왕 당시 비담의 난을 진압하면서 권력의 중심에 자신이 서게 된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왕권에 가까이 다가왔다는 느낌이 진해지면서 서서히 차기 권력 구도에 대해 치밀한 작전을 빠르게 세우기 시작했다.

무열왕과 김유신 장군은 결혼으로 두터운 관계를 형성하고, 신라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주인공이 되었다. 죽어서도 가까운 거리에 무덤을 두고 있다.


김유신을 앞세워 대신들을 지지 세력으로 우회시켰다. 김유신 옆에는 자신의 큰 아들 법민을 밀착시켜 감시하면서 친위세력으로 항상 가까이 두었다.

반면 마지막 성골 진덕여왕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그다음 자연스럽게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구도를 짜 맞추었다.

진덕여왕 당시 상대등이자 완력으로는 누구도 따를 수 없었던 알평을 고립시키고, 김유신을 중심으로 대신들의 지지층을 두텁게 만들어 진골 출신이지만 왕위에 오르는 일을 착착 순조롭게 진행했다.

김춘추는 왕위에 올랐지만 두 가지 걱정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했다. 첫 번째가 딸과 사위의 원한을 갚기 위해 백제를 치는 일이었다. 당나라 군사의 힘을 업고 백제 의자왕을 무릎 꿇게 하고, 윤충의 목을 베어 복수를 이룬 춘추는 하늘을 보며 다시 한 번 포효했다.

경주 남산자락 통일전 앞의 화랑지.
두 번째는 절대적인 우방이자 절친인 최고의 무신 김유신을 왕좌에 대한 욕심에서 멀어지게 하는 한편, 자신의 우호세력으로 두는 일이었다.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미리 간택하고, 처남인 김유신에게는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 이중적인 혈연관계로 두텁게 옭아맸다.

김춘추의 머리는 촘촘한 전략으로 짜여진 그물 같다. 그는 김유신이 처음 백제와의 전투에서 돌아와 좌절에 울부짖으며 단석산으로 들어가 수련에 몰두하는 모습을 눈여겨 보았다.

이어 김유신이 보검을 차고, 한층 깊어진 눈으로 돌아왔을 때 절대 그를 적으로 돌려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춘추는 김유신의 경지가 사람으로서는 감히 흉내를 낼 수조차 없는 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짐작했다. 이어 유신과의 친분을 두텁게 쌓으면서 서둘러 그의 누이와 결혼해 확실한 우방으로의 관계를 맺었다.

춘추는 집요하다. 아들이 태어나자 아내와 아들을 수시로 유신의 집으로 보내 교류를 두텁게 쌓았다.

특히 아들이 걸음걸이가 자유로워질 무렵부터 유신에게 사정하여 사제지간의 정을 맺도록 했다. 춘추의 아들 법민은 외삼촌 김유신으로부터 검술과 전쟁의 기술을 오롯이 물려받은 장수로 성장했다.

김유신 또한 전쟁터에서 적군 깊숙이 들어가 적진을 혼란스럽게 휘저을 때는 뒤를 받쳐줄 실력 있는 우군이 필요했다. 법민은 빠르게 무술을 배워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외삼촌을 따라 전쟁터에 나섰다. 법민은 뛰어난 자질을 가진데다 유신의 신적인 기술의 지도와 실전에서 익히는 검법으로 빠르게 실력을 쌓았다.

고구려와의 싸움에서는 오히려 법민이 앞장을 서고, 유신이 뒤를 호위하는 무사가 되었다.

왕위를 물려받은 법민은 전쟁을 끝내 백성들의 고통을 줄이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전쟁터에 뛰어들었다.

문무왕 법민은 칠순에 이른 외삼촌이자 무술의 스승인 김유신을 전쟁의 선봉에 세울 수 없어 자신이 직접 전쟁을 지휘하는 선봉장이 된 것이다.

경주 서악동에 위치한 무열왕릉 일대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김춘추의 전략은 성공적으로 맞아떨어졌다. 김유신의 신력을 가진 태산 같은 마음도 아들 같은 애제자이자 조카 법민, 즉 문무왕을 꺾고 왕위에 올라야겠다는 욕심은 애초부터 티끌만큼도 가질 수 없었다. 오히려 상대등으로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김춘추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돌아오는 김유신과 아들 법민의 손을 꽉 잡고 신라를 부탁하면서 이순의 나이로 영면에 들었다. 김유신은 수염이 희끗희끗한 턱이 떨리지 않게 어금니를 깨물면서 법민을 도와 신라 삼국통일을 이룩하겠노라 다짐하며 무열왕의 눈을 감겨 주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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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시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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