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의심한다

발행일 2019-08-13 15:09:49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나는 의심한다

오철환

객원논설위원

문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그땐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는 긍정적 의미로 받아들었다. 문 대통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촛불시위를 ‘촛불혁명’이라 즐겨 표현하고, 자신은 ‘촛불혁명’으로 집권했다고 자랑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면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나라’와 ‘촛불혁명’이란 용어를 그냥 수사적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의심을 이제야 해본다. 양자를 연계하여 지금까지의 경과를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혁명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급격한 변화가 나타나는 현상을 총칭한다. 그러나 혁명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정치적 혁명을 뜻하고, ‘시민운동, 봉기 등을 일으켜서 기존 정치체제를 급격하게 변경하는 것’을 말한다. 혁명은 흔히 민주적 정당성을 가지며 지배계층 교체와 체제변혁을 추구한다. 혁명 과정에 억울한 희생과 사회혼란이 따르고, 새로운 독재자가 등장하는 경우도 많다. 부작용이 광범위하게 나타나면 혁명이 실패로 끝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만큼 혁명은 어려운 과업이다.

적폐청산이란 명분으로 기득권 세력을 처단한 것과 이른바 캠·코·더(캠프, 코드, 더불어민주당) 인사로 요직을 장악한 것은 지배계층 교체다. 촛불정신을 헌법전문에 삽입하고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삭제하려 한 것은 체제변혁을 시도한 거다. 토지국유화를 찬성한다는 여당 대표의 발언과 삼성이 20조만 풀면 1,000만원씩 200만 명에게 나눠줄 수 있다는 여당 원내대표의 말도 섬뜩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한 마디도 허투루 하는 법이 없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지금까지 이해하지 못했던 여러 의문점들이 어느 정도 줄줄이 풀려나간다. 친중연북은 자연스럽다. 중국에 약속한 3불정책(사드를 추가배치하지 않겠다, 미국의 미사일 방어체계에 가입하지 않겠다, 한·미·일동맹에 참여하지 않겠다), 군의 손발을 묶어놓은 9·19 남북군사합의 등이 같은 줄기다. 9·19 남북군사합의는 전역장성들이 공산화 위험을 우려하면서 그 파기를 주장한 사안이다. 북핵을 심각하게 보지 않고 남의 일처럼 보는 점, 북핵 제재완화 역할을 자임한 점, 북미회담을 통하여 평화협정과 미군철수를 노린 점, 전시작전통제권을 조기 환수하려 하는 점 등도 역지사지하면 이해가 된다. 경제 영역에서 포용경제와 공정경제라는 이름하에 강행된 소득주도성장과 그 말썽 많은 다양한 정책 도구들도 다른 방향에서 보면 체제변혁을 꾀하는 징후로 읽힌다. 스튜어드십 코드를 통한 연금사회주의, 친노동반기업 정책 등도 그 방향성은 같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불필요한 희생과 사회혼란은 사뭇 혁명적이다. 독재자의 출현은 ‘글쎄’다. 부작용이 기승을 부리게 되면 혁명은 실패로 끝난다는 역사적 교훈은 엄혹하다.

경제전쟁은 일본의 치졸한 선공으로 시작되긴 했지만 우리가 일본을 자극한 면도 간과하기 어렵다. 약을 올려서 싸움을 촉발한 측면이 있다. 미국 비위를 상하게 할 행동을 의도적으로 지속함으로써 한미동맹을 계획적으로 삐걱거리게 했을 지도 모른다. 미국과 일본을 자연스럽게 정리하고 새로운 체제에 부응하는 북·중·러 안보라인으로 갈아타는 고도의 계산된 전략일 수 있다. 역사적으로 해양세력보단 대륙세력과 친하긴 했다. 북한의 역할은 투정하고 비난함으로써 한통속 의심을 사지 않는 일이다. 미사일을 쏘는 등 딴전을 피우면서 고기가 익기를 기다리고 있다. 정권핵심들의 경기어린 언행과 무력해 보였던 안보·외교정책도 뒤집어보면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고 볼 수 있다. 체제변혁에 대한 관심사를 따돌리는 기막힌 착상은 압권이다. 국제정세에 떠밀려서 불가피하게 체제가 수동적으로 변혁되는 상황은 국민에게 의식하고 반발할 겨를도 주지 않는다. 최근 난국을 보는 이러한 주관적 추론은 과도한 의심에 기인한 가설로 치부할 수 있다. 부디 어리석은 사람의 기우이길 진정 바란다.

그렇지만 촛불시위를 혁명이라 하긴 무리다. 박근혜정권은 헌법절차인 탄핵을 통해 와해되었고, 문재인정권도 현행헌법에 규정한 국민투표를 통해 탄생됐다. 현 정권이 혁명정부가 아니라는 의미다. 따라서 현 정권은 체제변혁 권한이 없다. 헌법체제 내에서 권한을 가지며, 그 한도 내에서 제도개혁 권한만 가진다. 체제를 변혁하려면 ‘가고자 하는 체제’가 어떤 것인지 국민 앞에 그 정체를 명확히 밝히고, 그에 맞게 우선 헌법을 개정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은 체제변혁은 위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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