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부자집 교촌은 독입운동가와 밀정 드나드는 주무대, 일제의 감시 눈초리 삼엄
백산무역주식회사는 본사를 부산에 두고 서울, 원산에까지 지부를 둬 경영하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거점 역할을 했다. 최부자집 창고의 서류들은 해방 이후 김구 선생의 이야기로 전해지는 “임시정부의 지원금 6할은 백산에서 나왔다”라는 말을 뒷받침하고 있다.
특히 일본의 경북도 경찰책임자가 1919년 10월20일자로 경주 최부자 최준에게 독립운동에 가담해서는 안된다는 자제 경고문을 보내온 문서가 최부자집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백산은 최준이 사장을 맡고, 안희제, 윤상은 등이 임원으로 참여했다. 임원 대부분이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인사들로 백산은 처음부터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한 회사로도 볼 수 있다.
백산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초기부터 경비를 조달하는 데 기여하면서 부실이 가속화 했다. 최준은 부친 최현식과 1921년 만석꾼의 재산 대부분을 담보로 조선식산은행으로부터 35만 원을 대출받아 투입했지만 백산은 결국 1928년 130만 원의 부도를 내면서 파산했다.
백산의 현대식 대차대조표와 영업보고서는 깨끗하게 남아 경제학계의 연구자료로도 가치가 높다. 백산의 운영 과정을 밝히는 대차대조표는 현대식으로 작성됐다. 1919년 11월6일 현재 합계잔액시산표를 보면 자산 131만9천 원에 불입자본금 25만 원, 부채 110만3천 원, 당기순손실이 3만4천 원으로 나타난다. 불입자본금 규모에 비해 부채와 손실이 크게 발생한 것은 막대한 독립운동 자금 지원의 결과로 추정된다.
한편 창고에서 보관되고 있는 4천여 통의 편지글과 엽서, 명함들이 최부자의 인맥을 상상하게 한다. 최부자의 사랑채에는 독립운동가들 뿐 아니라 친일파들의 출입도 잦았다.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가 왕세자 때에 머물기도 했고, 의친왕과 덕혜옹주도 방문했다. 명사들의 사교장이었다. 일제가 노골적으로 탄압할 수 없었다. 경찰을 동원해 일상적인 감시를 펼치면서 항일세력과의 연계를 차단하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펼치기도 했던 곳이다.
의병장 신돌석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장기간 최부자집 식객으로 은신했다. 대한광복회 우편마차 습격을 모의하고, 탈취한 세금을 은닉한 장소도 최부자집 사랑방이었다. 백산무역주식회사의 산실도 교촌이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일경의 감시를 피해 교촌으로 숨어들었고, 비밀리에 자금을 전달받았던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다.
최부자는 대를 이어 사회적 책무를 중하게 생각했다. 11대 최현식은 경주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다. 12대 최준은 백산무역주식회사를 맡아 전 재산을 담보로 독립운동자금을 조성하는데 기여했다. 최준의 둘째아우 최완은 임시정부 재무부 위원으로 일했는데 일제에 체포됐다가 석방 직후 순국했다. 셋째 아우 최순은 백산무역의 상무를 맡아 독립자금 조달에 힘썼다. 해방 후 일제 고등계 형사 출신에 암살당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