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실력

정명희

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



아침저녁 공기가 확연히 다르게 느껴진다. 풀벌레 울음소리도 조금 바뀌었다. 매미들의 노랫소리도 훨씬 더 애절하게 다가오고, 저녁이면 어느새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오니, 어느새 가을맞이 준비를 해야 할 때다. 견디기에 수월한 계절이니 무언가 담담하게 준비를 해야 할 것도 같고 또 계획도 알차게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깔끔하게 정리를 하고 가을을 맞아야겠다 싶어 버릴 것부터 골라내기 시작했다. 읽다가 접어든 책을 들고서 과감히 쓰레기 박스에 넣는 순간, ‘000 혜존’이라고 쓴 지은이의 필체가 눈에 들어온다. 마치 그분을 대한듯하여 얼른 집어 들었다. 마저 읽어야지 다짐하면서, 언젠가는 모두 정리해야 할 물건들일진대 아직은 미련이 남아서인지 좀체 실천이 쉽지 않다.

지난해보다는 더위가 그다지 심하지 않게 지나간 듯한데 이번 여름엔 유난히 부고 소식이 많았다. 가까운 지인들의 경사에는 기쁜 마음으로 찾아가거나 축의금을 인편에 보내기도 하지만 조사에는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장례식장을 찾을 때마다 어김없이 다녀가셨다는 지인이 계신다. 그분을 식장에서 뵈면 언제나 말씀하신다. ‘잘 죽는 것도 실력’이라고. 옛 친구들이 추풍에 낙엽지듯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기 시작한 지 오래되었다고 하시며 이야기보따리를 펼치신다. 80대 중반을 넘어서고부터는 날이 갈수록 몸이 쇠약해져 어느 날 갑자기 모임에 나오지 않으면 “그 친구 갔군”하고 생각해야 한다고 하시며 무엇보다 준비를 잘해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같이 학교에 다녔던 동기들이 해를 거듭할수록 가을바람에 낙엽처럼 사라지는 비율이 나날이 높아간다며 자신도 준비를 열심히 하고 계시는 듯하다. 돌아가실 때가 되어도 끝까지 존엄하게 살다 가야지 다짐하신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친구의 부친이 돌아가셔서 추모하러 장례식장을 찾았더니 그 친구 또한 진지한 얼굴로 한마디 거든다.

“사람이 죽는 것도 실력이 있어야 할 것 같아. 대단한 실력은 죽음을 차분히 준비하여 자신의 의지대로 마무리하는 것 말이야.”

친구 부친은 갑작스레 말기 암으로 진단되어 시한부 판정을 받으셨다. 갑자기 닥쳐오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 얼마나 황망하였을까. 하지만 그분은 마지막을 찬찬히 준비했던가 보다. 부인을 위해 작은 집을 마련하고, 자식들에게는 일일이 부탁의 편지와 함께 남은 재산을 조금씩 선물로 나누어주셨다. 그리고는 “나이 들어가면서는 준비를 잘해야 한다. 그것이 진짜 실력이다. 마지막까지 잘 아파야 하고, 잘 죽어야 한다. 그래서 내가 아플 때 쓸 비용과 죽고 나서 들어가는 돈을 미리 저축해두었단다. 너희들 살기도 힘든데 부모가 아파서 들어가는 비용까지 감당하게 해서야 어디 쓰겠냐. 내가 나를 위해 조금씩 평생 준비해 놨으니 걱정은 하지 말아라. 그리고 내가 이 세상을 하직하기 전까지 자주 얼굴 보여주고 목소리 들려주면 그것으로 만족한단다.”라고 이르셨다고 한다.

그분은 임종을 앞두고선 의사에게 심정지가 오면 연명치료를 하지 말라는 약속을 받고 문서에 사인까지 미리 직접 하셨다. 자식들에게 아버지 연명치료 여부를 결정하는 아픔을 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 미리 준비하셨으리라. 임종이 가까워지면 1인실로 옮겨서 마지막을 맞고 싶다고 하셨다. 자신이 고통에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고 누군가 겁먹을 수 있을 터이니 가족들과 조용히 있고 싶다는 뜻이지 않았겠는가.

간혹 장례식장에서 생전의 모습으로 기억해두고 싶은 영상 편지를 남기는 이들의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아들, 딸, 며느리, 사위, 그리고 손자들에게 가슴 뭉클한 작별 인사를 하기도 하고 또 지인들에게 특히 사이가 좋지 않았던 분들에게 용서를 당부하는 말을 남기기도 한다. 친구 부친의 영상편지에는 “사랑하는 아들아, 아버지가 부탁이 있다. 가끔 내가 보고 싶거든 하늘을 봐라. 아버지가 모두 너희 잘되라고 하늘에서 기도하고 있을 것이니 한 번씩 꼭 하늘을 보면서 살아라. 힘들 때는 하늘을 보면서 다시 힘을 내라.”고 하셨다.

계절이 바뀌는 길목에서는 새로운 준비를 하게 된다. 우리 인생의 가을에도 이런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플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마지막 가는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존엄성을 잘 지키면서 마무리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면서.

남은 이들이 함께했던 순간을 떠올리면 늘 미소 지을 수 있도록, 진정한 실력을 쌓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깔끔한 마무리야말로 한 인간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긴 진짜 실력 일터이니.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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