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 헤아리기



배병일

영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백세인생 이라는 노래가사가 한 때 유행한 적이 있다. 가사 내용을 들어보면, 이미 부모님을 여읜 분들이야 그 애잔한 마음이 가눌 수 없을 것이고, 특히 아직 부모님이 구존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말미암아 직접 모시지 못하고 있는 중년의 자식들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기에 바쁜 가사이다. 요즘 가요의 신곡은 주로 젊은이들이 공감을 해야만 히트를 칠 수 있지만, 중노년은 아직도 6070이나 7080노래에 머물고 있는 등 인기가요의 장르 자체가 아예 달라서 신곡의 인기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그래서 백세인생 노래가 한때 히트를 쳤지만, 젊은이의 뒷받침이 없어서 롱런은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부모에 대한 애정이 효라고 하여 옛날부터 하나의 사회적 윤리규범이 되어 효도라고 일컬어져 왔지만, 지금에 와서는 여러 가지 사회적 문화적 변형으로 인하여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다. 특히 고령인구의 급속한 증가로 인하여 종전에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던 100세 이상 생존하시는 분도 많아지고 있다. 내 주위에도 육순·칠순자식이 팔순·구순부모를 모시는 경우가 많다. 노부보다는 노모가 휠씬 부양하기가 편하다고 하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마음대로 쉽게 되는 것은 아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너무 오래 살아서 자식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미안함과 너무 오래 살아서 혹시나 질병 등으로 거동을 못하게 되어 자식 등 남에게 부담이나 추한 모습을 보이기 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이 함께 있는 것 같다. 어쨌든 지금 우리나라는 노인이 노인을 보살피는 노노캐어가 큰 문제이다. 지난번 대선 때도 문재인대통령이 치매는 국가의 책임이라는 공약으로 조금 재미를 보았다고 할 정도로 치매는 고령화사회에서 심각한 사회적 문제이다. 사실 그냥 목숨만 부지하는 인생보다는 건강하게 정신이 맑게 사는 인생이야말로 올바른 고령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건강하게 정신이 맑다는 것은 혼자서 움직이면서 치매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치매를 노망이라고 할 때는 질병으로 보지 않았지만, 치매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답게 살 수 없도록 하는 질병임에 틀림없다. 모일간지에 매주 게재된 김형석교수의 100세일기가 인기다. 몇 달전 교수님의 선배 이야기를 빌려서 치매 부인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내용인즉, 아내가 치매를 앓았는데 워낙 성격이 착했기 때문인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쪽 옷장의 옷들을 저쪽 옷장으로 옮겨 놓았다가는 다시 순서를 바꾸어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을 종일 계속하곤 했다는 것이다.

구순을 넘긴 노모께서도 몇 년 전까지는 농사일을 하는 등 본업에 충실하였지만, 그만 고관절골절로 인하여 거동이 부자연스럽게 되면서 집안에만 머물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당신이 원하는 바를 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육체적 정신적 고통도 함께 온 것 같고, 그 후부터 이상한 언행을 보이기 시작했다. 노모는 저녁마다 부엌에 들어가서 그릇을 헤아리고 있었고, 장롱을 뒤져 수의를 찾았고, 그리고 아침마다 그릇과 수저가 없어졌다고 하고 수의가 없어졌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무슨 연유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해 하다가 어느 순간에 치매라는 것을 알았을 때, 자식으로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치매는 언행이 서툴고 정신이 흐린 것이라는 것만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 후회스러웠다. 특히 장롱이나 찬장 등 무엇을 뒤지거나 옷이나 그릇 등 무엇을 헤아리는 것이 초기 치매라는 것을 일찍 알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지금도 그 역정을 받아주기보다는 차가운 반응을 먼저 보이는 등 자식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불효를 나도 모르게 하고 있으니, 참으로 망측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불효 언행을 미루어 볼 때, 조선시대와 우리세대 이전에 효도를 직접 행하신 선현들이나 선배들은 효라고 하는 것을 정말로 몸에 베여 있었구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이고. 이렇게 하다가 나도 치매에 걸려서 그릇을 헤아리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되면 나는 어떻게 하지’하는 생각이 떠오르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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