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픽션과 팩트 사이, SF영화

▲ 영화 마션의 한 장면.
▲ 영화 마션의 한 장면.
▲ 영화 패신저스 한 장면.
▲ 영화 패신저스 한 장면.
▲ 영화 괴물 포스터.
▲ 영화 괴물 포스터.
▲ 영화 인터스텔라 포스터.
▲ 영화 인터스텔라 포스터.


▲ 영화 패신저스 포스터.
▲ 영화 패신저스 포스터.
‘픽션’은 분명 허구다. 그렇다고 ‘완벽한 허구’라 하기에 썩 개운치 않다. 영화는 ‘어쩌다’가 아닌 ‘어쩌면’을 함의한다. 특히 공상과 과학이 깃든 영화는 응당 현실을 수반한다. 현재를 토대로 미래상을 제시한다는 것인데 바로 ‘공상과학영화’의 아이덴티티다.

실제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 초반 제작된 SF영화의 주요 소재는 지구 온난화, 핵전쟁, 우주화 시대 등으로 점철됐다. 당시 영화의 시점은 주로 2000년 중·후반으로 설정되곤 했는데 현재에 이르러 돌이켜보면 일맥상통한 부분이 적지 않다. 다시 말해 영화는 ‘픽션’과 ‘팩트’가 합쳐진 ‘팩션’ 정도로 보는 것이 근접한 정의일 듯.

그간 숨 가쁘게 내달려온 연재 일정이었다. 인공지능(AI)과 각종 산업군의 만남을 주선하느라 가일 층 박차를 가해온 날들은 잠시 물린다. 대신 이번 연재는 몇 편의 SF영화를 소개하고 가벼운 소회를 나눌 수 있는 그저 무겁지 않은 시간이 되길 바란다.





◆반드시 돌아갈게. ‘마션’

우주 세계에서의 ‘생존’을 그린 작품이다. 엔지니어이자 식물학자인 주인공이 화성 탐사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참가하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어렵사리 화성 착륙에 성공한 일행은 그곳에 숙소를 세우고 화성 탐사의 첫발을 내딛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처음이라는 우려가 현실이 된 순간을 맞닥뜨린다. 화성 도착 후 일주일. 모래폭풍이 일기 시작했고 이로 말미암아 프로젝트의 모든 프로세스는 하릴없이 중단을 맞는다.

이로 인해 주인공은 일행과 떨어져 원치 않은 고립무원에 직면한다. 동료들은 각기의 몸에 부착된 생체 신호 작동이 중단된 것을 확인한 뒤 주인공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일행은 화성의 먼지로 남을 주인공을 추모하며 그곳을 뒤로한다. 콘트롤 타워였던 나사(NASA) 역시 주인공의 죽음을 공식화하기에 이른다.

천운이었을까. 모래폭풍의 여파로 발생한 상처가 되레 공기 유출을 방지, 이로 인해 슈트의 압이 소멸되지 않음에 따라 주인공은 천신만고 끝에 목숨을 부지하게 된다. 이제부터는 생존이다.

바로 이 지점부터 삶의 끈을 부여잡으려는 주인공의 사투가 그려진다. 그에게 남은 건 300일간의 식량뿐. 돌아간 일행은 4년 뒤에나 재탐사를 시도할 것인데 말이다. 주인공은 우선 그간 모아둔 인분을 활용, 화성에서 생성된 흙에 인분을 깔아 거름으로 이용한다.

이제는 싹을 틔우기 위한 물이 필요하다. 주인공은 로켓연료를 떠올린다. 거기서 하이드라진과 질소를 개별 추출해낸 뒤 바닥을 드러낸 수소와의 연소를 통해 물을 퍼올릴 방도를 찾아낸다.

문제는 불을 피우기 위한 도구가 없다는 것. 주인공은 떠난 일행의 짐 꾸러미에서 나무 십자가를 찾아낸다. 그리고 그곳에 불을 피운다. 비록 폭발은 일어났지만, 우주 헬멧을 착용한 주인공은 또 한 번의 천운을 받아들인다. 물론 연소에도 성공한다.

이로 인해 감자밭을 두르고 있던 비닐에 이슬이 맺히기 시작한다. 그 이슬이 흙과 인분에 스며듦에 따라 감자의 싹이 돋아난다.

이렇게 삶을 영위해 가던 주인공은 수일이 지난 후 NASA의 정밀 위성사진 분석을 통해 생존소식을 알리게 된다.

의지의 산물이었으리라. 충전되고 있어야 할 로버가 어느 순간 이동해 있다는 사실을 NASA가 뒤늦게나마 발견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NASA는 주인공의 생존과 생환을 위한 구출 작전에 돌입했고, 중국과의 공조를 통해 새 보급선 제작과 신속한 발사를 위한 프로세스에 착수한다.

결국 NASA와 탐사대의 노력으로 주인공은 무사 귀환을 맞이한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고 끈을 놓지 않았다. 삶의 의지와 동료애, 그리고 불세출의 감성 ‘사랑’이라 함은 시·공간을 초월했다.





◆그곳에도 사랑은 있다. ‘인터스텔라’

미래세계의 암막을 보는 듯하다. 인터스텔라의 배경은 분명 디스토피아다. 모래먼지로 가득한 노란 세상. 황사로 인해 호흡마저 가쁘고, 유일로 생존을 영위했던 옥수수마저도 병충해의 폐해로 소멸될 위기에 봉착한다.

바로 이때 4차원의 문이 가시화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4차원이라기보다는 ‘모세의 기적’인양 유토피아로 가는 틈새가 열리는 셈이다. ‘희망의 로드’쯤으로 여겨보자. 주인공은 당위성이 있다. 바로 ‘인류 구원’의 차원이다. 이를 위해 그는 그의 사람들을 뒤로한 채 우주로의 개척을 떠난다. ‘제2의 지구’라는 시발을 위해 떠날 고독한 여정.

이 영화의 백미는 ‘영상미’에 있다. 수십 광년을 아우르는 성간 여행은 SF 영화 특유의 입체미를 선보인다. 별 사이에 발생하는 개별의 성질 탓, 별들은 별도의 시간과 환경을 지닌다. 아름다운 장미 속 날카로운 가시가 상존하듯, 반짝임을 수놓은 아름다운 별나라 여행에는 생사를 걸어야 하는 리스크가 아울러 도사린다.

공상과학에도 ‘사랑’은 스며들어 있다. 시기와 시대를 막론하고 사랑은 ‘불멸의 상징성’을 내제한다. 수 십·백 광년을 지나야 할 먼 거리임에도 결국엔 내 고향, 그리고 내 사람으로 회귀한다는 것. 아마도 ‘수구초심’의 본능적 감성이 영화 곳곳에 깃들어 있는 듯하다.

출발은 디스토피아를 대처하기 위한 대체 세계로의 탐험기를 담아내고 있다. 하지만 종국엔 미지의 범주로 신비로움을 내포하고 있는 우주에 관한 개척과 순수한 열정, 그리고 의지를 소개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딜런 토머스의 시 한 구절로 영화를 갈음할 수 있을 듯하다. ‘쉬 어두운 밤을 수용하지 말아야 할 것.’





외롭지만 외롭지 않다. ‘패신저스’

인터스텔라와 출발지점은 대동소이하다. 인구는 많고, 땅덩어리는 시나브로 줄어든다. 그렇기에 더 이상의 지구는 좁다. 생존의 위협은 자연스레 ‘탈 지구화’의 시류를 탄다. 이윤을 좇는 기업에선 ‘우주로의 이주 프로세스’ 사업 구축에 벌써부터 여념 없다.

영화의 배경은 ‘아발론 호’로 명시되는 우주선이다. 신 행성으로의 탈출을 원하는 승객 5천 여 명을 싣고 광활한 우주 공간을 비행한다. 도착 예정시간은 120년 후. 승객들은 겨울잠을 자는 상태로 캡슐에 안착해 있다.

하지만 비행의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다. 아발론 호는 불명의 우주 잔재와 충격, 그에 따른 소음과 파장으로 인해 주인공은 본의 아니게 동면에서 깨어난다. 출발 후 30년이 지난 시점. 도착까지는 아직 90년이나 남았는데 말이다. 아마도 인간 세상에서의 수명으로는 신 행성의 유토피아도 채 맛보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

다시 잠에 빠지기는 만무하다. 모든 것이 잠들어 있는 그만의 시간. 외로웠고 또한 고독했으며 무던히도 추웠다. 죽음은 알 수 없는 것이기에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소실점에 다다르기 전, 죽음을 필연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을 미리 알아채 버렸다면 그 후의 삶은 삶이 아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죽기 위한 수단을 연구한다. 하지만 ‘인명은 재천’ 이랬던가. 절망 속 가느다란 삶을 유지해가던 와중 주인공은 ‘오로라’와 맞닥뜨리게 된다. 거기서 과연 희망을 찾았을까. 이 의문의 답은 관객의 몫으로 남긴다. 다만 최첨단의 디지털 세상은 결국엔 더불어 가는 것이 아닌 혼자만의 고독을 감내해야 한다는 양면성을 주지시킨다. ‘편의를 좇는 본능’과 아울러 말이다.





◆가족의 재발견 ‘괴물’

한국 SF영화의 심벌이자 불세출의 수작으로 일컬어지는 ‘괴물’을 놓칠 순 없었다. 꽤나 시간이 지난 작품임에도 부정(父情)은 부정(不正)할 수 없다는 원론적 의미를 재확인시켜준 가족 영화다.

한강 둔치에서 매점을 운영하는 주인공과 그의 아버지, 그리고 사랑하는 그의 딸. 자식들의 ‘나라’가 되는 그의 이름은 아버지였다. 하지만 인류의 이기로 말미암아 발현된 괴생명체의 출현은 이들의 소박해마지않는 일상을 원치 않는 특별한 그 날로 이끌어 낸다.

괴생명체의 공격으로 사망자 명단에 오른 딸의 이름을 발견한 아버지, 그리고 그의 가족들은 결단코 포기하지 않는다. 위험구역으로 통제된 한강 유역으로 잠입한다. 그때부터 딸의 생존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그들만의 사투를 벌인다.

감독은 말한다. 이 영화는 SF적 기술력을 투영했을 뿐, 단순 공상도 상상력의 산물도 아니다. 괴생명체는 영화를 돋우기 위한 주요 장치, 딱 그 정도다. 괴생명체에 굴복하지 않는 가족애, 그들은 먹먹한 가슴을 묵묵한 걸음으로 대신했으리라. 팍팍한 세상, 헐은 저녁 한 끼에 그저 감사해야 하는 시린 오늘에, 그래도 가족은 말랑했고 풍족하며 따뜻할 것임을 믿는다.



글·사진 군월드 IT사업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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