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근 엽채 일급/ 김연대

이순 지나 고향으로 돌아온 아우가/ 버려두었던 옛집을 털고 중수하는데/ 육십 년 전 백부님이 쓰신 부조기가 나왔다/ 을유년 시월 십구일/ 정해면 오월 이십일/ 초상 장사 소상 대상 시 부조기라고/ 한문으로 씌어 있었다/ 육십 년 전 이태 간격으로/ 조모님과 조부님이 돌아가셨을 때의 일이다/ 추강댁 죽 한 동이,/ 지례 큰집 양동댁 보리 한 말,/ 자강댁 무 열 개,/ 포현댁 간장 한 그릇,/ 손달댁 홍시 여섯 개,/ 대강 이렇게 이어져 가고 있었는데,/ 거동댁 大根葉菜一級이 나왔다/ 대근엽채일급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나는 그만 핑 눈물이 났다/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한/ 내 아버지, 할아버지와/ 이웃들 모두의 처절한 삶의 흔적/ 그건 거동댁에서/ 무시래기한 타래를 보내왔다는 게 아닌가.

- 시집『아지랑이 만지장서』(만인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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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4년 동안 우리 경제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어마어마한 외형적 폭풍성장을 해왔다. 경제성장과 함께 사회적인 인프라와 국민의 생활상도 크게 바뀌었다. 특히 1945년 70%에 달했던 농업 인구는 현재 5% 남짓이다. 시의 배경인 안동 길안마을 역시 전형적인 두메산골 농촌지역이다. 시에서 ‘을유년’은 바로 1945년 광복을 맞은 해이고 ‘정해년’은 2년 뒤 1947년이다. 농지개혁 이전이므로 당시 전체 경지 가운데 3분의 2는 소작지였으며, 206만호 농가 중 자작농은 14%에 불과했다.

시에서의 생생한 ‘부조기’는 당시 우리 농촌의 생활상과 인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죽 한 동이’ ‘보리 한 말’ ‘무 열 개’ ‘간장 한 그릇’ ‘홍시 여섯 개’ 60년대 계란꾸러미와 메밀묵, 백설탕 등이 인기선물이자 주요 부조품목이었음을 기억하는 우리에게도 무척 소담스럽다. 하지만 낯선 품목이 아닐 수 없는데, 그 이후 세대에겐 참으로 생경한 부조물품이리라. 우리네 조부와 부모님 세대들이 고스란히 겪었던 가난과 그 가난 가운데서도 서로 따스한 인정을 나누며 돕고 살았던 눈물겨운 삶의 기록이 아닌가.

살림살이야 남루하기 그지없지만 이웃끼리 서로 보듬고 나누며 살아오면서 누구네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르는지, 겉보리소출이 얼마인지, 숟가락이 몇 개인지 빠삭하게 서로의 형편을 살폈다. 이웃에서 큰일을 치면 온 동네사람들이 ‘간장 한 그릇’으로, ‘홍시 여섯 개’로, 그도 아니면 몸을 때우는 걸로 거들었다. 그중에 ‘대근 엽채 일급(大根葉菜一級)’ ‘무시래기 한 타래’라니, 무슨 사족이 더 필요하랴. 지난 세월동안 우리는 물질이 넘쳐나는 세상을 누리며 산다고 여겼으나 이웃에 누가 병으로 속울음을 울고 있는지, 누가 밤사이 죽어나갔는지 모른다.

탈북민 모자가 굶어 죽은 지 두 달이 지나도록 누구 하나 관심조차 갖지 않은 채 오로지 나 자신과 내 가족만을 위해 이기적인 관행으로 살아오진 않았는지. 문상과 부조는 진정으로 아픔을 나누고 위로하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살이 방편으로 덤덤하고 간결한 애석함의 표시에 지나지는 않는지 돌아볼 일이다. 경제적인 삶의 질은 높아졌다지만 각종 범죄, 자살 등 비경제적 지표들은 갈수록 악화를 기록했다. 보이스피싱을 비롯한 사기범죄는 날로 지능화되었으며 남의 돈을 날름 떼어먹고도 당당한 사람들로 넘쳐나니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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