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내가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다이아나 루먼스

만일 내가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먼저 아이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집은 나중에 세우리라/ 아이와 함께 손가락으로 그림을 더 많이 그리고/ 손가락으로 명령하는 일은 덜 하리라/(중략)/ 더 많이 아는 데 관심 갖지 않고/ 더 많이 관심 갖는 법을 배우리라/ 자전거도 더 많이 타고 연도 더 많이 날리리라/ 들판을 더 많이 뛰어다니고 별들도 더 오래 바라보리라/ 더 많이 껴안고 더 적게 다투리라/ 도토리 속의 떡갈나무를 더 자주 보리라/ 덜 단호하고 더 많이 긍정하리라/ 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사랑의 힘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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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살아온 생을 돌아보면 후회와 미련이 박혀있는 대목이 있기 마련이다. 내 경우 다른 무엇보다 실패한 결혼과 더불어 아이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는 회한이 크다. 아이가 생겼다고 저절로 좋은 부모가 되고 좋은 자녀로 자라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타고난 성품과 재능이란 게 있겠으나 아이들은 백지와 같아서 어떻게 키우느냐에 따라 모든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고백컨대 나는 아이들에게 그리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했다. 모범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위엄도 없었다. 아이 역시 썩 좋은 아들로 성장한 것 같지는 않다.

솔직히 후회막급이다. 아이와 하나가 되려는 노력은 물론이거니와 아이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조차 부족했다. 누가 내 이력을 들추어 공격한다 하더라도 자식에 대한 부분만큼은 티끌 잡힐 게 없지 싶다.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는 동안 졸업식 말고는 한 번도 학교에 찾아간 적이 없으며, 아이들의 성적 또한 늘 평균 이하면 이하였지 평균을 상회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둘 다 군대도 제 알아서 가고 작은 아이가 복무했던 부대는 강원도 오지 최전방이라 단 한 번 면회를 가지 못했다. 그 대목만큼은 지금도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루먼스는 부모의 통제과잉을 경계했지만 나는 거의 방임수준이었으니 부정적 의미의 방치에 가까웠다. 더 많이 관심 갖는 법을 배우게 하지도, 더 많이 껴안지도 못했다. 그 모든 것의 시늉을 안 하지는 않았겠으나 결국 바라보는 일에 인색하여 작은 도토리 속에 큰 떡갈나무가 있다는 걸 보여주지 못했다. 모든 부모들은 아이를 잘 키우길 원하지만 나로서는 첫 단추를 잘 못 끼운 탓에 맥없이 시간을 흘려보낸 뒤 불감당이 되었다. 자녀를 가르치는 최선의 교육은 부모의 사랑과 모범인데 그러지 못했다. 아비의 능력으로 도움을 주지도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른버짐 같은 황폐한 그 자리에 할머니란 존재가 계셨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각자 제 인생을 살고 있지만 그래도 못마땅한 것 투성이다. 만약 아이를 키울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잘 한번 키우고 싶다. 이 시처럼 자존감을 높여나 주는 말, 잠재력을 길러주는 말, 재능을 살릴 수 있는 말, 희망과 용기를 주고 꿈을 갖도록 하는 말을 먹고 자라도록 하겠다. 말은 생각을 지배하고 행동을 유발하며 삶을 이끌어갈 것이므로. 또 생명의 존엄을 가르치고 이웃을 생각하며 책무와 자기 자신에 엄격하도록 가르칠 것이다.

물론 그러자면 부모부터 그 소양과 자질이 갖춰져야 하리라. 여전히 한국사회에서는 ‘끗발’이 통하고 자식 교육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이번 조국 후보자 자녀문제 논란과 한진 일가의 무너지는 모습 등을 보면 팔다리의 힘이 쪽 빠진다. 내게도 여섯 살 손녀 ‘지혜’가 있다. ‘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의 힘을 가진 사람’으로 잘 자라기를 바랄 뿐이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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