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김천 ‘배금도가·배금초’

자연을 닮은 부부가 만드는 막걸리와 식초

비단처럼 아름다운 술 빛깔 ‘배금도가’

3대를 이어가는 술과 식초 명가

전통 기술로 술과 식초를 만드는 백년가업 전통 세우고 싶어



시인 조지훈이 ‘완화삼’이란 시를 지어 박목월에게 보냈다.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 마을의 저녁노을이여’.(일부 발췌)

박목월이 ‘나그네’라는 시로 화답했다. ‘길은 외줄기 남도 삼 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일부 발췌)’

청록파 시인의 시(詩)답게 서정적이고 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담았다고 평가받는 시다. ‘술 익는 마을’이란 시구(詩句)보다 선비의 풍류와 나그네의 유랑을 더 잘 표현한 말은 찾기 어려울 것 같다.

풍류를 알고 즐겼던 우리 민족은 한 잔 술에 웃고 시름을 풀었다. 그만큼 술과 가까웠다.

백두대간 우두령 아래에서 자연을 닮은 부부가 술을 빚고 식초를 만든다. 주인공은 배금도가·배금초(이하 배금도가)의 김보홍(66)·정현선(61) 공동대표다.

이들 부부는 술과 식초를 만들기 위해 백두대간 깊은 산속으로 찾아 들었다. 오로지 술과 식초만을 만드는 귀농 8년 차의 중견 강소농이다. 우두령 아래 산속에서 술과 식초를 만들어 연간 5천여만 원의 소득을 올리는 ‘자연형 강소농’이다.

◆3대를 이어가는 술과 식초

이들 부부는 농촌과의 인연은 크게 없다. 다만, 농사는 부모님의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김보홍·정현선 공동대표는 젊은 시절 서울에서 살던 금융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정현선 대표가 전혀 무관한 분야였던 술과 식초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핏속에 숨어 있던 기운이 꿈틀대기 시작한 것일까?

그 기운은 외할머니에서 어머니로 그리고 딸로 전해 내려왔다. 정 대표의 외가는 전남 광양에서 양조장을 했다. 외할머니의 술 빚는 솜씨는 인근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그 솜씨는 어머니께로 전해졌고, 어머니는 식초를 만드는 것까지 발전시켰다.

술과 식초는 같은 원리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가능했다. 원료도 곡물과 누룩으로 같다. 알코올 발효가 일어나면 술이 되고, 초산 발효가 되면 식초가 된다.

정 대표가 그 피를 이어받았다. 어느 순간, 식초와 술이 좋아졌다. 서울 한복판의 아파트에서 술을 만들었다. 집 전체가 시큼한 냄새로 가득해 가족들의 민원(?)을 초래했다.

때마침 건강에 이상을 느낀 남편이 “차라리 시골로 가서 본격적으로 만들어 보자”며 귀촌을 제안해 의기투합했다. 귀촌지역을 선택하기 위해 전국을 헤매다가 지인의 소개로 백두대간 아래 김천시 구성면에 안착했다.

◆6개월 동안 공들인 막걸리

‘배금도가’에서 만든 막걸리는 알코올 함량이 18%로 요즘 나오는 소주보다 독하다. 그런데도 뒷날 숙취가 전혀 없다. 배금도가만의 특별한 비법 때문이다.

막걸리를 만드는데 무려 6개월이 걸린다. 일반 막걸리가 일주일이면 되는 것과 비교하면, 24배의 시간이 소요된다.

고두밥과 누룩을 섞어서 1개월 동안 발효를 시키고, 5개월간 숙성을 시킨다. 이후에 보관실에서 보관하다가 주문이 들어오면 판매한다.

그러나 보관실에 오랫동안 보관되는 술은 없다. 배금도가의 막걸리를 구입하려는 예약자들이 줄 서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6개월이라는 긴 공정을 거치면 독특한 꽃 향이 나고 감칠맛이 배가된다. 40~50대의 장년층보다 오히려 20~30대의 청년층에게도 인기다.

박람회에서 시음과 판매행사를 하고 나면, 청년들이 SNS를 통해 홍보를 해주는 덕분에 보관된 막걸리는 금세 동이 난다.

주변에서는 6개월이란 긴 시간이 걸리는 공정을 보고 경제성이 없다고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처음 6개월만 지나면 ‘선입선출’ 방식에 의해 꾸준히 판매와 생산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금도가의 증류주는 지금 7년째 저온창고에서 잠을 자고 있다. 3년 후나 세상에 나올 예정이다.

◆‘느림의 미학’ 식초

배금도가에서 만드는 식초는 다양하다. 복숭아 식초를 비롯해 아로니아 식초, 감식초, 포도 식초, 현미 식초 등 원료에 따라 다르다.

일반 양조식초와 다른 점은 느림의 미학으로 만드는 ‘느림보 식초’라는 점이다. 고두밥과 누룩을 섞고, 식초의 맛과 향을 만드는 과일의 발효액을 첨가해서 3개월의 초산발효과정을 거친 후 다시 6~9개월간의 숙성과정을 거친다.

배금도가의 장독대에는 누룩과 혼합한 복숭아와 아로니아, 포도 등 과일 종류별로 담긴 식초 항아리들이 도열해 있다.

◆발효의 최적지 ‘배금도가’

술과 식초는 이웃사촌이다. 곡물과 누룩을 혼합해 발효과정을 거치는 것이 기본이다. 알코올발효와 초산발효의 차이다.

발효식품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미생물인 효모균이다. 지역의 환경에 따라 다르다. 한국에서는 주로 황곡균을 쓴다. 반면에 일본은 흑곡균을 쓰고 중국은 홍곡균을 쓴다. 어느 균이 좋고 나쁨을 말할 수는 없다. 나름대로 특성과 효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지역의 기후와 환경에 따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배금도가’가 있는 백두대간 인근에서는 특이하게도 황곡균과 함께 홍곡균과 흑곡균이 함께 나타난다. 아마도 백두대간과 인접해 온도와 습도, 바람이 효모균의 증식에 좋은 조건을 제공하여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인다. 그래서 정대표는 “발효식품인 술과 식초를 만드는 데에는 이만한 곳이 없다”고 자랑한다.

◆ 비단처럼 아름다운 빛깔의 술 ‘배금(配錦)’

‘배금도가’라는 농장 이름이 특별하다. ‘배금’은 비단처럼 아름다운 ‘술 빛깔’이라는 의미다. 맛과 함께 보기도 아름다운 술을 빚으라는 의미다.

농장 이름에 대한 사연이 있다. 3년 전쯤 도인처럼 보이는 손님이 농장에서 하룻밤을 묵어 간 적이 있다. 백두대간을 7번 완주했다는 70대의 여성이었다.

그때 하룻밤 신세를 진 보답으로 “농장의 이름을 지어 주겠다”고 한 후 떠나갔다. 당초 쓰던 이름은 ‘풀빛 발효식품’이었다. 한 달 후 그가 다시 찾아와 ‘배금(配錦)’이란 이름을 지어 주며 “3년이 지나면 이름값을 할 것”이라고 했다.

그 도인의 예언처럼 3년이 지난 요즘 배금도가의 막걸리와 식초는 인기 절정이다. 정대표는 “농장 이름을 바꾼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면서 “이름처럼 아름답고 맛있는 술과 식초를 천천히 만들어 가고 있다”고 한다.

◆ 고두밥 연습에 쌀 10가마 버려

귀농 2년 차에 친정어머니로부터 본격적으로 식초에 대한 비법을 전수하였다. 농가 한 편에 있는 황토방에서 고두밥을 찌고, 누룩을 만드는 법을 배웠다. 쌀을 물에 불리고, 솥에 찌기를 반복했다.

번번이 어머니로부터 퇴짜를 맞았다. 술과 식초를 만들기 위한 최상의 고두밥을 짓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말로만 듣고 책으로 보던 이론과는 달랐다. 실전은 어렵고 힘들었다.

그때 고두밥 짓기 연습용 쌀이 무려 10가마에 이른다. 한 가마가 80kg이니 총 800kg의 쌀이 고두밥 잘 만들기 훈련용으로 사용됐다. 모녀가 황토방에서 고두밥 짓는 훈련(?)을 하는 동안 남편은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나 정도가 지나치자 남편이 “당신은 안 되겠으니 포기하라”고 역정을 냈다. 믿었던 남편으로부터 “포기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 눈물이 쏟아졌다.

그때 어머니가 나섰다. “한 번에 잘 하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니고, 한번 못한다고 해서 타박할 일도 아니다”라면서 “욕심내지 말고 천천히 하고, 옆에서도 기다릴 줄 아는 여유를 가지면 좋겠다”고 타일렀다.

어머니의 그 말 한마디에 부부는 다시 힘을 합쳤다. 이제는 눈으로만 봐도 가마솥 안 고두밥의 상태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전문가 수준이 됐다.

김대표는 “이제 식초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은 고수입니다”라고 정대표를 치켜세운다.

◆백년가업의 전통

느림의 미학을 즐기는 부부의 꿈은 막걸리와 식초의 전통기법을 계속 이어가면서 희망하는 사람에게 전수해 백 년을 넘는 전통을 이어 가는 것이다.

그 후계자는 자식이든 남이든 상관없다. 이들 부부는 “누구든지 술과 식초를 사랑하고, 전통기술을 잘 이어가기를 약속한다면, 그 기술을 아낌없이 전수해 주겠다”고 한다.

그 약속을 지키는 방법으로 외부 강의를 선택했다. 경북농민사관학교에서 식초제조법에 대한 특강을 한다. 수도권의 모 대학에서는 6주간의 일정으로 강의를 한다. 먼 거리에 강의를 위해 오가는 길이 힘이 들긴 하지만, 열정적으로 강의를 한다.

최근에 서울에서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는 딸이 ‘술과 식초’에 관심을 가지고 “대를 이어갈 생각이 있다”는 뜻을 밝혀 부부는 한층 신바람이 났다. 역시 엄마에게 이어받은 핏줄의 대물림인가?

정현선 대표는 “꿈꾸던 백년가업의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며 “정말 평생 큰 욕심 없이 자연과 함께 살아왔지만, 배금도가의 술과 식초가 백 년 가업으로 가는 길, 이것만은 욕심을 내고 싶다”고 속마음을 밝힌다.

물론 기술의 외부 전수(傳授)도 계속해나간다는 계획에는 변함이 없다.



글·사진 홍상철 대구일보 객원편집위원

경북도농업기술원 강소농 민간전문위원

팜라이터 ilsok@korea.kr



이홍섭 기자 hslee@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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