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땅, 용자(勇者)의 나라

이성숙

거울처럼 눈부신 하늘이다. 당장이라도 하늘이 부서져 유리 파편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오랜만에 캘리포니아 날씨가 정상을 찾았다. 한동안 서울의 초가을 날씨처럼 선들선들해서 사람들의 걱정을 사던 날씨가 열기와 명도를 안고 돌아왔다.

가까운 해변으로 나들이를 했다. 역에 차를 세웠다. 미국에 살면서 해 봐야 할 것 몇 가지가 있다. 국립공원 내 캠핑과 대륙횡단 여행, 그리고 기차여행이다. 그 중 한 가지를 실천하는 날이다. 기차여행은 시간을 거스르는 듯한 묘한 매력을 준다. 비행기처럼 빠르게 당도하지 않아 좋고, 자동차처럼 조바심 낼 필요가 없어 좋다. 생활이 주는 가파른 긴장에서 놓여나게 하고 세상과 사람을 구경하는 여유를 누리게도 한다. 기차로 미국 대륙횡단을 해야겠다는 모종의 꿈을 안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다.

부에나 팍 기차역에는 매표소가 없다. 티켓 자동판매기 앞에서 사용법을 읽었다. 알파벳 첫 글자를 찍은 후 해당 역 이름을 찾으면 모니터에 가격이 뜨고 결제를 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엘에이 유니온 역까지 간 후 메트로 선을 갈아타고 산타모니카 역까지 가는 게 목표다. 유니온까지는 약 20분, 유니온에서 산타모니카까지는 1시간 반이 걸린다. 왕복으로 티켓을 샀다.

메트로 링크는 엘에이 외곽을 운행하는 라인이다. 엘에이 도심을 오가는 메트로 라인을 중심으로 메트로 링크가 방사선으로 뻗어 있다. 각 노선은 색으로 구별되어 있다. 메트로 선으로 갈아타지 않고 그대로 간다면 엘에이 북쪽 외곽인 샌 버나디노까지 올라갈 수 있다. 오렌지 라인의 남쪽 끝은 샌디에이고까지 이어진다. 이 코스는 해안을 따라 놓여 있어 바다를 바라보며 갈 수 있다니 조만간 시도해 볼 생각이다.

매트로 링크 내부는 좌석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도록 되어 있는 열과 한 방향으로 놓인 열이 반씩이다. 기차에는 부랑걸인이 많이 탄다고 해서 내심 겁을 먹었으나 오전이라 그런지 험상궂어 보이는 사람은 없다. 열차 내부는 서울의 지하철보다 깨끗하다. 열차 내에서 음식을 팔지는 않는다. 유니온에서 커피나 프레즐을 사들고 올라오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테이블 있는 좌석에 가방을 내려놓자 아들을 데리고 탄 흑인 부인이 함께 앉아도 좋겠는지 묻는다. 여행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부인은 특유의 곱슬머리를 정성스럽게 땋고 머리카락 끝에 장식을 달았다. 그러고 보니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맞은편 대각선에는 수염에 염주 같은 것을 매단 청년이 전화통화 중이다. 청년의 어깨를 드러낸 몸에는 거의 빈틈없이 문신이 있다. 목덜미와 허리춤에도 젊은 끼가 새겨져 있다. 맞은편 좌석이 비어 있지만 다리를 뻗어 발을 걸치고 있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는다. 일상 보아 오던 모습들이 낯설게 다가온다. 같지 않으면 이상하거나 어색했던, 무례함이 통하던 서울과 많이 다른 모습이다.

젊은 흑인 부인은 아들과 불꽃놀이를 보러 간다고 한다. 이날은 독립기념일이다. 해마다 이날 산타모니카 해변에서는 대형 불꽃놀이가 펼쳐진다. 그래서 인지 기차는 만원이다. 나는 만원이라고 말하고 있고 그녀는 기차가 붐빈다며 약간 불편해 한다. 서울처럼 사람과 사람이 부딪혀 서야 할 정도는 아니다. 평소에는 빈자리가 많다는데 이날은 서 가는 사람이 대여섯 명 있는 정도다.

인구밀도 높은 한국에서 차 안이 붐빈다고 하면 사람들이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빽빽이 타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 미국 사람은 좌석이 다 차서 몇 사람이 서 있는 상태를 붐빈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서울의 만원버스나 전철을 생각하면서 혼자 웃었다. 서로 다른 경험은 서로 다른 해석을 낳나 보다.

산타모니카 역을 빠져나오자 사람들이 모두 공통의 목표를 가진 듯 일제히 한 방향으로 걷는다. 콜로라도 블러바드를 따라 10여 분, 나도 그들 사이에 섞여 해변으로 걷는다. 성조기 문양의 옷차림도 많다. 차량이 통제된 거리에 자전거와 세그웨이가 달려 나간다. 사람들은 아무데나 자전거를 세워둔 채 가버리고 또 다른 사람이 길에 세워진 자전거나 세그웨이를 타고 떠난다. 이곳은 일찌감치 공유경제가 실현되고 있다.

슬리퍼를 벗어 들고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바다에 이른다. 바닷물이 발끝을 적신다. 이글거리는 태양을 이고 섰는데도 바닷물 냉기에 몸이 흠칫 놀란다. 이내 솜처럼 흡수력 좋은 심장으로 바다가 스민다.

몇 시간 후면 이곳에서 축제가 시작될 것이다. 제트 스키를 타는 사람, 모래 위에서 커피를 홀짝 거리는 사람, 음성 높낮이가 만들어 내는 화음. 멋들어지게 자유를 누리는 이들이 부럽고 경이롭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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