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는 만난다

발행일 2019-09-01 15:53:34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는 만난다

정명희

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

벼가 익어간다. 가을이 다가왔다. 학술대회 장소로 가는 길옆, 들판에는 벼가 누렇게 익어 간다. 올해는 유난히도 추석이 일찍 찾아왔지만, 논밭의 색으로 보니 그래도 올 된 햇곡식과 과일로 차례 상을 차릴 수 있을 것 같아 그나마 다행스럽다.

차창을 열고서 천천히 달려보며 가을의 향기를 음미한다. 코에 묻어 드는 바람을 들이키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기적이라도 울리며 기차가 달려갈 듯한 철길 사이로 풀들이 자라나 있고 그 너머엔 키 큰 해바라기들이 소리 없이 영글고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도 그리움을 간직한 채 늘 고향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반가운 나의 친구처럼.

우연한 기회에 단체의 장을 맡게 되었고 그리하여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게 되었다. 뜻있는 지도자의 제안으로 그곳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고국의 동료들을 찾아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다른 일정으로 참석을 못 하게 되어 아쉬워하다가 마침 잠깐 짬을 내어 얼굴만 보고 일어서라는 총무의 권유에 못 이겨 따라나섰다. 예정에도 없는 일정이라 마음은 불안했지만, 그래도 애초에 거절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지못해 승낙한 참이었다.

국제회의장 근처의 자그마한 레스토랑, 어두운 불빛 아래서 서로 간단한 소개가 이루어졌다. 언제 한국을 떠나 이곳에 정착하였고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하는 사람이라는 등, 자유롭게 자기를 알리는 시간이었다. 누가 누군지 모두 기억하지는 못하였지만, 그중에 유독 나와 학번이 같은 이의 목소리가 귀에 박혔다. 기다랗게 앉은 테이블에서 이쪽과 저쪽 대각선으로 얼굴은 볼 수 없지만, 희미하게 들리는 그의 억양이 유난히 친근하게 들렸다. 소개하는 말투도 전형적인 서울 말씨가 아닌 경상도의 높낮이가 살짝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혹시? 하는 생각에 저녁을 하고 일어서면서 그에게 다가갔다. “나는 지방 oo에서 온 누구누구이다. 학번이 나와 같아서 반가워 인사하러 왔다.”라고 했다. 그러자 그가 대뜸 나의 친구 이름을 대면서 아느냐고 묻는 것이 아닌가. 바로 같은 여고를 입학했다. 여고 동창일 수도 있었다니. 같은 학교에 들어갔다가 서울로 이사 가는 바람에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도미하여 미국에서 정착, 지금껏 살았다고 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아직 경상도의 억양이 남아 있다니. 너무나 반가워서 우리 둘은 어깨를 맞대고 끌어안다가 사진을 찍고 연락처를 교환하며 서로 추억을 나누었다. 수십 년도 더 지나서 만난 그와 나, 무엇이 그리도 강하게 우리 둘을 끌어당겼을까. 말의 끝에 남은 억양이었을까. 아니면 고향의 냄새였을까. 동시대를 살았다는 학번이었을까. 우리 둘을 그리도 강하게 끌어당겼을까 강한 자석처럼 말이다.

서로 메일을 주고받으며 어제 만난 친구처럼 옛날을 회상하는 친구, 어쩌면 그는 수백만 년 동안 만년설로 얼어있던 거대한 뿌리의 빙하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은 아닐까. 나는 이쪽에서 그는 저쪽에서 떨어져서 같은 물길을 따라 흘러가다가 가끔씩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도 만나지 못하였던. 그러다가 드디어 부딪히고 나서야 알게 된 존재는 아닐까. 고등학교 시절의 영화 이야기도 비슷하다. 영자의 전성시대, 사랑의 계절, 얄개…. 모두 우리의 뇌리에 박혀있는 추억의 그 이름, 고국의 가을을 생각하면 언제나 그립고 그리운 풍경이라던 그. 편지함에서 나의 메일을 발견하고 어떤 표정을 지을까. 친구들아! 명화를 보며 감동하듯이 이 가을 멋지게, 서로 살아가는 모습 가끔씩 보여주고 힐링 좀 하자꾸나.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바이올린 협주곡의 선율이 강물 위로 흘러 다닌다. 멋진 멘트가 이어진다. “입김으로 뜨거운 음식을 식힐 수도 있고/ 누군가의 언 손을 녹일 수도 있다/ 눈물 속에 한 사람을 수몰시킬 수도 있고/ 눈물 한 방울이 그를 얼어붙게 할 수도 있다/ 당신은 시계 방향으로/ 나는 시계 반대 방향으로 커피 잔을 젓는다/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우리는 마지막까지 서로를 포기하지 못했다/ 점점, 단단한 눈 뭉치가 되어갔다/ 입김과 눈물로 만든”

가을이 내게 속삭인다. 하늘은 파랗고 햇살은 밝아 참으로 좋은 날이다. 이런 가을날,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는 만나지 않던가요? 떠내려가는 빙하의 조각처럼?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어느 시인의 시처럼.

‘시계탑에 총을 쏘고, 손목시계를 구두 뒤축으로 으깨버린다고 해도 우리는 최초의 입맞춤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나는 시계 방향으로 당신은 시계 반대 방향으로 우리는 천천히 각자의 소용돌이 속으로 다른 속도로 떠내려가는 유빙처럼’

<저작권자ⓒ 대구·경북 대표지역언론 대구일보 .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댓글 (0)
※ 댓글 작성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책임을 담아 댓글 환경에 동참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