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의 적/ 박지웅

나 오래전 희망에 등 돌렸네/ 그날 희망은 내 등에 비수를 꽂았네/ 그러나 그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비극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만이 지켜봐주었네/ 언젠가 내가 천천히 무대 끝에 섰을 때/ 그가 내밀던 따뜻한 거짓말이 없었다면/ (중략)/ 나 희망과 너무 가까웠네/ 죽일 수도 없었네, 희망은 그냥 사라지는 것/ 시체가 아니라 실체가 없었네/ 어리석고 친절했던 내 삶을 미워하지 않으리/ 그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네/ 희망은 손뼉을 받으며 희망으로 돌아가네/ 나는 나에게서 사라지네

- 시집『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 (문학동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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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절망의 기운으로 휩싸인 틈새를 비집고 희망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면, 그것은 한 몸에서 싹튼 ‘내부의 적’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때로는 그들의 ‘따뜻한 거짓말’이 위로가 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대립적 상황으로 맞서거나 양 극단에서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를 정말로 경멸하여 제거하려든다면, ‘등에 비수를 꽂’는다면 그 한 몸은 결국 공멸하고 말 것이다. 서로 등을 돌리거나 앞에서는 다투는 듯 보이더라도 뒤에서는 함께 손을 맞잡고 가야할 운명이다.

절망의 토양에서 희망의 싹이 움트기도 하고 희망의 뿌리에서 절망의 종균이 자라기도 한다. 하지만 실체가 없기에 죽일 수는 없다. 어차피 ‘희망은 그냥 사라지는 것’이어서 ‘내부의 적’을 긍정한다. ‘희망은 손뼉을 받으며 희망으로 돌아’간다. 불안한 삶에서 희망은 고마운 배려임이 분명하지만, 그 희망이 우리에게 올 때의 얼굴은 다채롭다. 유효한 희망의 변별이 쉽지 않다. 희망도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에 현혹될 수도 있다. 그리고 희망이든 절망이든 스스로에게 중독되면 진짜로 희망은 없다. 반성하지 않는 희망을 받아들일 몸은 없는 것이다.

청문회는 끝났고 대통령의 시간만 남았다. 이리저리 살펴야할 게 적지 않겠으나 바둑 격언에 ‘장고 끝에 악수’라는 말이 있듯이 오늘 아침을 넘기지 말았으면 좋겠다. 어느 경우라도 ‘조국 정국 2라운드’는 예고되어 있다. 이번 청문회에서 흥미로운 대목은 금태섭 의원이 ‘마지막 질의’에서 밝힌 소회였다. 그는 후보자의 딸이 서울대환경대학원 재학 중 장학금을 받고, 동양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는 어머니 밑에서 연구보조원으로 등록하고 보수를 받은 사실을 지적했다.

등록금 때문에 휴학해야 하고, 학기 중에도 알바를 뛰어야 하는 젊은이들을 생각할 때 어쩔 수 없이 화가 났다고 했다. 설사 딸이 원했어도 부모가 재직하는 학교에서는 막았어야 온당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의 공정성에 대한 기대나 가치관에 큰 혼란을 줄 것 같아 걱정된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진영 간의 대결이 된 현실, 정치적 득실 등 많은 고려사항이 있겠지만, 그 모든 것을 저울 한쪽에 올려놓고 봐도 젊은이들의 상처가 걸린 반대쪽으로 제 마음이 기울어지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이러한 발언에 김종민 의원은 반발했다.

“그걸 몰라서 얘기 안 한 게 아니다. 5%의 허물, 95%의 허위사실 가운데서 꼭 5%의 허물을 이야기해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금 의원의 발언은 ‘내부 총질’이라는 비판과 ‘소신 발언’이라는 격려로 명백히 엇갈렸다. 설령 ‘내부의 적’이라 할지라도 그 적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 들이냐의 문제는 정부여당은 물론이거니와 우리의 정치발전과도 관련이 깊다 하겠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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