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도 노변정담(爐邊情談)이 필요하다

이부형

현대경제연구원 이사



앤 리차드는 대공황이 한창이던 1933년 미국 텍사스에서 태어나, 제45대 텍사스 주지사를 지낸 유명 여류 정치인이다. 그녀가 정치인으로 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1988년 아틀란타주에서 있었던 민주당대회 기조연설이 엄청난 호응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연설에는 많은 내용이 담겨져 있지만, 아직도 회자되는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메시지다.

“저는 우리의 젊은이들이 대공황과 세계대전을 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정말이지 너무도 다행스럽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젊은이들이 제가 알았던 지도자들을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은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어려운 상황이 닥쳤을 때 우리에게 희생이 필요하며, 이러한 어려움은 한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해준 지도자들 말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다르고, 또는 고립되어 있거나, 아니면 특별한 관심사가 있어서 힘들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하나로 뭉치게 했고, 국가적 사명감을 부여해 주었습니다.”

어린 시절 라디오를 통해 당대의 지도자를 접하며 자란 그녀가 이렇게 말한 이는 프랭클린 루즈벨트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미국의 제32대 대통령으로 미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4선 대통령이다. 고비 때마다 ‘노변정담(fireside chats)’이라 불리는 대국민 담화로 대공황을 극복하고,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승리할 수 있도록 죽는 날까지 자국민들에게 국가적 사명감을 불러일으키도록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루즈벨트 대통령의 노변정담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큰 영향력을 발휘했을까?

루즈벨트 대통령의 라디오 대국민 담화는 취임 직후인 1933년 3월12일 ‘은행위기에 대해’라는 13분짜리 연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정작 노변정담이라 칭해진 것은 이것부터가 아니라 ‘유럽전쟁에 대해’라는 2번째 담화부터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평소 참모들과 벽난로를 에워싸고 대통령 담화문을 만들고 암기한다는 것에서 영감을 얻은 CBS 방송 경영진이 2번째 담화 직전에 배포한 보도자료에서 노변정담이라 칭한 것이 유래가 된 것이다.

노변정담은 당시 미국의 명운을 좌우할 대내외 정책과 법안 등에 대한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것만으로 국민 통합이 이루어지고 정책 추동력이 생겨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2가지 특징이 노변정담에 없었다면, 아마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는커녕 당시 상황을 더 혼란스럽게 했을지도 모른다.

첫번째는 노변정담이 마치 친구를 대하는 듯한 진심 어린 말투와 염려스러운 어감으로 국민에게 다가가 큰 위로와 희망을 안겨주었다는 점이다. 1차 담화문에서 잘 알 수 있듯이 ‘내 친구들(My Friends)’로 시작되어, “이것은 나의 문제 이상으로 당신들의 문제입니다. 일치단결한다면 잘 해결될 수밖에 없습니다”와 같이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함과 동시에 1, 2인칭을 써서 친근하게 매듭지어진 것처럼 말이다.

두번째는, 노변정담이 주요 정책이나 법안을 이해하기 쉽도록 간단명료하게 전달하고, 이를 통해 국민들이 수많은 소문과 억측에 편승하지 않도록 예방했다는 점이다. 이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2월23일의 ‘전쟁의 경과에 대해’라는 담화를 발표하기 전 국민에게 세계지도를 준비하라고 요구한 데서 잘 알 수 있다. 미국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세계 민주주의를 지키고, 지속 번영하기 위해서는 도대체 어디서 전쟁을 하고 있는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등 국민이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취지였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노변정담이다. 우리 모두 삶이 점점 더 팍팍해지고 있지는 않은지, 분열로 치닫는 사회를 보면서 위기의 한복판에서 각자도생에 빠져 외롭고 힘든 나머지 위로과 격려가 필요한 것은 아닌지 걱정되기 때문이다. 과거 미국인들이 누렸던 것처럼 이번 추석에는 ‘내 친구들’로 시작되는 노변정담이 꼭 듣고 싶다고 한다면 너무 큰 바람일까.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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