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 권력 다툼에 13세의 어린 왕은 왕비마저 빼앗기고

발행일 2019-09-16 20:00: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28> 성덕왕과 수로부인

통일신라 중기 가장 평화로운 시대 성덕왕, 귀족들의 정치에 휘말려 왕비와 태자도 돌보지 못해

신라 33대 성덕왕릉에서부터 호석과 12지신상, 회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2지신상은 호석과 별도로 조각해 회랑에 세웠다. 동방동 철길을 지나 효소왕릉과 나란히 있다.
성덕왕릉 가는 길은 효소왕릉과 같이 들판과 야산이 푸르게 초목들로 어우러져 공원을 이루어 산책하기에 좋다.
성덕왕릉 남쪽 200여m쯤 앞에 화강암으로 규모가 큰 귀부가 엎드려 있다. 등에 비석을 올려두었던 흔적이 넓게 남아 있다. 조각 솜씨도 뛰어나 앞발가락 5개, 뒷발가락 4개가 돌출되어 금방이라도 헤엄쳐갈 듯하다.
성덕왕릉에는 석인상이 2기 보인다. 동쪽의 석인상은 목이 부러져 접합한 채로 서 있지만 서쪽의 석인상은 가슴 위로만 남아 있다.
성덕왕릉 동서남북에 4구의 사자상이 정교하게 새겨진 예술품으로 남아 있다.
성덕왕릉의 12지신상들은 별도의 돌로 조각해 회랑에 세웠지만 대부분 머리부분이 훼손되고 없다. 왕릉에는 닭의 신상만 머리부분이 남아 있고, 가장 완벽한 원숭이 상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 전시되고 있다.
성덕왕릉에서 비교적 완벽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닭 신상과 회랑 전경.
완벽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성덕왕릉의 원숭이 신상.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경덕왕이 아버지 성덕대왕을 위해 만들기 시작해 그 아들인 혜공왕에 의해 771년에 완성된 성덕대왕신종. 전체적으로 우아한 형태와 화려한 장식, 아름답고 여운이 긴 종소리 등 우리나라의 종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성덕왕의 큰아들이자 태자의 신분에서 중국으로 유학해 구화산에서 화성사를 지어 설법하며 지장보살로 이름을 떨쳤다. 입적한 지 3년이 되어도 시신이 썩지 않아 등신불로 봉안되고 있다. 한·중 수교를 기념해 중국의 신도들이 김교각 지장보살 입상을 제작해 불국사 무설전에 모시고 있다.
신라 33대 성덕왕은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다. 형 효소왕이 702년 17살의 나이로 죽자 성덕왕 또한 13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성덕왕은 35년간 왕위에 있었다. 전쟁이 없어 신라 중기의 가장 평화로운 시대로 평가되는 시기에 백성을 위한 정책을 많이 개발했다. 그러나 형 효소왕이 17세에 사망하고, 성덕왕도 세자 책봉의 과정 없이 어린 나이에 국인들의 추천으로 왕위를 이어받았다. 이는 귀족들의 권력 다툼에 의한 왕손들이 자리에 오르고 내렸던 것으로 국정이 귀족들에 의해 움직여 왕권은 약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성덕왕이 첫 번째 왕비를 내치고 김순원의 딸을 두 번째 왕비로 맞이하고, 성덕왕의 아들 34대 효성왕도 김순원의 딸을 왕비로 맞아야 했다. 김순원의 권력이 조정의 중심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다.

중국의 지장보살로 추앙받고 있는 김교각은 성덕왕의 큰아들이라는 기록이 여러 곳에 남아있다. 김교각 지장의 본래 이름이 중경이었다는 기록과 성덕왕의 첫 번째 세자 중경이라는 이름이 일치하는 것으로 미루어 김교각이 성덕왕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성덕왕과 수로부인에 대한 삼국유사를 소개하고,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김교각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엮는다.

◆삼국유사: 성덕왕과 수로부인

-성덕왕: 제33대 성덕왕 때인 신룡 2년 병오년(706)에 벼가 알곡을 맺지 않아 백성의 굶주림이 심했다. 정미년(707) 정월 첫날부터 7월30일까지 백성을 구하려 세곡을 풀었는데, 한 사람당 하루 3되씩을 기준으로 삼아 나누어주었다. 일이 끝나 계산해 보니 합계 30만500석 이었다.

왕은 태종대왕을 위해 봉덕사를 짓고, 인왕도량을 7일간 베풀면서 대사면을 내렸다. 처음 시중직을 만들었다.

-수로부인: 성덕왕 때였다. 순정공이 강릉태수로 부임해 가다가 해변에서 점심을 먹었다. 곁에 바위 절벽이 마치 병풍처럼 바다를 보고 서 있는 데 높이가 1천 길이나 되었다. 철쭉꽃이 활짝 피어 있어 공의 부인인 수로가 그것을 보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꽃을 꺾어 바칠 사람 누구 없나요?”

“사람의 발로는 다가갈 수 없는 곳입니다요.”

종들이 그렇게 말하고 모두 손을 내저었다. 곁에 한 노인이 암소를 몰고 가다가 부인의 말을 듣고 그 꽃을 꺾어서 노래까지 지어 바쳤다. 그 노인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이틀쯤 길을 간 다음이었다. 또 바다 가까이 있는 정자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바다 용이 잽싸게 부인을 끌어다 바다로 들어가 버렸다.

공은 뒹굴며 땅을 쳤건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때 또 한 노인이 나타나 말했다.

“옛사람의 말에 ‘뭇 입은 쇠라도 녹인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저 바다의 방자한 놈이라도 어찌 뭇 사람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이 마을 사람들을 모아다가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지팡이로 해안을 두드리면 부인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공이 그대로 따랐더니 용이 부인을 받들고 바다에서 나와 바쳤다.

수로부인의 자태와 얼굴이 너무도 뛰어나 매번 깊은 산과 큰 연못을 지날 때면 여러 차례 신물들에게 끌려가는 고충을 겪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김교각의 새옹지마

김교각은 통일신라가 가장 평화로운 시기에 성덕왕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세상의 복이란 복은 모두 타고난 행운아로 보였다. 그러나 그러한 복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의 화려한 시대는 짧았다.

당시 신라는 삼국통일을 이루고 당나라와의 전쟁도 잠잠해 백성이 전쟁의 고통에서 벗어나 농업과 상업 등의 생업에 몰두할 수 있는 평화의 시대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왕권을 둘러싸고 권력 다툼이 내적으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효소왕을 17세에 몰아내고 성덕왕을 왕위에 올린 세력들은 다시 주도권 싸움을 시작했다. 이찬 김순원은 일찍이 자신의 딸 소덕을 후궁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성덕왕 15년에 중경과 수충을 낳은 성정왕후를 외척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을 잠재운다는 등의 이유로 궁에서 내보냈다. 다음해인 717년 태자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성덕왕은 집권 7년을 넘어서면서 왕으로서의 권위보다 백성의 안위를 걱정하는 성군으로 소임을 다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지역을 직접 돌아보는 행보를 자주 가졌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궁내의 일에는 소홀하게 되었다. 결국 왕비를 내쳐야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되면서 태자의 안위까지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성덕왕은 김순원 세력의 정치적 압력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면서 태자인 아들 중경의 생명이 위험함을 직감하고, 왕은 중경을 내실로 불러 눈물의 이별을 고했다. “아들아, 아비가 못나 네 신병을 편하게 돌보지 못하게 되었구나. 비밀호위 일곱을 각자 너로 분장해 중국으로 피신하게 할 터이니 그중 하나와 승려로 위장해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거라. 다시는 신라로 돌아올 생각도 말고.”

어머니의 죽음까지 묵묵히 지켜본 중경은 왕인 아버지의 늘어진 어깨를 힘없이 바라보다 엎드려 절을 올리고는 돌아섰다.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산소에 절을 올린 중경은 호위무사 김진과 함께 유람하듯 오히려 추적자의 뒤를 밟으며 중국으로 도망가는 유학의 길에 올랐다.

중경의 뒤를 추적하던 김순원의 살수들은 하나같이 중국 경계지역에서 초죽음이 되도록 얻어맞고 ‘더이상 추적하지 마시오. 나는 살아서는 신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오. -중경’이라는 목간을 받아들었다. 김순원도 일곱 갈래로 추적했던 대원들이 같은 소식을 들고 돌아오자 추적을 포기했다.

성덕왕은 거짓 신분을 위장한 시신을 화장하고 태자가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김순원 세력도 태자에 대한 의혹을 추궁하지 않고 태자의 사망 소식을 공식화하는데 동의했다. 이어 자신의 딸을 소덕왕후로 삼게 했다. 김순원의 권력에 대한 집착은 갈수록 심해져 성덕왕이 죽자 소덕왕후의 아들을 34대 효성왕에 오르게 했다. 또 그는 다른 딸을 효성왕에게 시집보내 왕후로 삼게 했다. 효성왕은 결국 이모와 결혼해 왕비로 삼아야 했다.

중경은 이름을 김교각으로 바꾸어 도망할 때 입었던 승복을 그대로 걸치고 수도에 정진했다. 그는 구화산에서 화성사를 지어 불법을 전파하는데 열중했다. 김교각의 명성이 지장보살로 널리 퍼지면서 그의 설법을 듣기 위해 신도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김교각은 794년 99세 되는 어느 날 마지막 설법을 하고 참선하면서 조용히 입적했다. 그의 시신이 3년이 지나도록 썩지 않아 등신불이 되었다. 구화산 지장보전에는 아직도 그의 등신불이 봉안되어 있다.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의 소재가 되어 교과서에 소개되고 있다. 그는 죽어 등신불이 되었고, 중국의 신도들이 제작한 입상으로 고향 땅 경주로 돌아와 대중을 만나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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