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 / 원무현

아버지/ 뽕밭에 묻어야 했던 날/ 나와 어린 동생은 장맛비 속에/ 하염없이 고개를 꺾었지요// 바람 앞에 촛불처럼 겨우 붙어 있던 목/ 추스르신 어머니/ 아픈 목을 쓸어안으며/ 팍팍한 세상 잘 떠났지 뭐/ 죽은 사람은 죽은 것이고/ 산사람은 살아야지/ 팽! 코를 푸실 때/ 쪼개진 구름 사이에서/ 색종이 같은 햇살이 쏟아져 내렸지요/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얘들아 해바라기 같은 내 새끼들아/ 고개 빳빳이 세우고 저기/ 저기 해 좀 보아/ 아무리 보아도 어머니/ 어머니 눈엔 아버지 얼굴만 떠있었는데요

- 시집 『홍어』 (한국문연,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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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 시인의 시들이 실패하는 이유가 여럿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무언가를 자꾸 설명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나도 전에 그랬고 지금도 그 습성은 남아있다. 제 스스로 시의 설계도를 깔끔하게 그려낼 재간이 부족한 탓도 있겠고, 독자들의 감상수준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여 납득과 공감을 얻으려다 도리어 난삽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반면에 ‘시적 장치’의 지나친 비약과 함축, 지적인 시에 대한 막연한 동경, 혹은 ‘시적 상상력’을 핑계로 문맥의 부정확을 방기하는 것 역시 초보 시에서 자주 보이는 결함들이다.

시의 난해성 여부와 문학성과는 거리가 멀다. 대중성 획득을 위한답시고 억지 이미지를 덧씌우거나 낡고 다 아는 메시지를 에워싸는 상투적인 서술이 지적 받는 것이지, 쉽게 소통 되는 시가 문제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맥락도 없이 난해한 시는 지적인 시로 분칠한 것일 뿐 문학성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 ‘문학성’과 ‘대중성’을 한꺼번에 얻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바람직한 좋은 시의 형태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원무현의 시도 같은 미덕을 지니고 있다. 우선 그는 좋은 시인으로서의 자질과 기질을 지니고 있다. 그의 모든 감각기관과 세포가 일제히 시를 향해 열려있고, 오랫동안 ‘시적인’ 삶을 살아냈기 때문만은 아니다.

시의 언어가 생리적으로 체험이나 사물의 구체를 겨냥하기 때문만도 아니다. 좋은 시인은 그의 내면의 상처를 복기, 분석하여 그것에 보편적 의미를 부여할 줄 아는 사람이다. 고만고만한 시인들의 대개는 자기의 감성적 상처를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그것을 억지로 감춤으로써, 끝내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의 망토를 벗지 못하는데 반해 원무현의 시에는 삶과 자신의 체중이 고스란히 실려 있다. 서정의 갈래는 각기 다르지만 함민복, 도종환, 유홍준, 문동만 등의 시가 그러한데 그리 읽혀지는 시인은 의외로 많지 않다. 그의 첫 시집 ‘홍어’에는 삭힌 홍어만큼이나 그 향취가 농후하고 불콰한 기색이 역력하다.

‘해바라기’는 시인 자신의 상처와 회상에 머물지 않고 시를 읽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정서적 반응으로 자리하게 되는데, 사실은 시집 표제작인 ‘홍어’가 농도에 있어서는 더 짙은 편이다. 한 편의 시로 빙그레 미소를 머금거나 가슴이 따뜻해지고 머리가 맑아질 때가 있다. 흔치 않지만 눈물을 자아나게 하는 시도 있다. 웃음과 울음은 맥박수를 증가시키고 혈액순환을 돕고 산소의 호흡량을 증가시켜서 건강에 이롭다고 한다. 오히려 울음은 눈물을 통해 체내의 유해한 독소물질이 빠져나가기 때문에 웃음보다 더 유익하다고 한다. 그래서 예전엔 명절 다음날 영화관을 찾아 팽! 울음 코도 곧잘 풀었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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