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없는 나라/ 이시영

어디 남태평양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섬은 없을까. 국경도 없고 경계도 없고 그리하여 군대나 경찰은 더욱 없는. 낮에는 바다에 뛰어들어 솟구치는 물고기를 잡고 야자수 아래 통통한 아랫배를 드러내고 낮잠을 자며 이웃 섬에서 닭이 울어도 개의치 않고 제국의 상선들이 다가와도 꿈쩍하지 않을 거야. 그 대신 밤이면 주먹만 한 별들이 떠서 참치들이 흰 배를 뒤집으며 뛰는 고독한 수평선을 오래 비춰줄 거야. 아, 그런 ‘나라’ 없는 나라가 있다면!

- 시집『호야네 말』(창비,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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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좀 세다고 으스대는 나라들 눈치 안 보고, 가까이 지내기엔 애당초 글러먹은 일본과는 영원히 멀리하고 싶고, 잘해보려 해도 툭하면 꼬장만 부리는 북한을 달래기에도 지쳐가는 그런 때엔 정말 이런 ‘나라’없는 나라에나 가서 여생을 사는 게 복장 편하겠다는 생각이 왜 아니 들까. 거기에다가 요즘처럼 정치인은 무엇 때문에 존재하고 필요한 지를 심각하게 회의케 할 때에는 더욱 그렇다. 인류학자들에 의하면 아주 옛날 태초의 인간은 죽은 동물들의 사체를 차지하기 위해 하이에나들과 으르렁거리며 경쟁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국가를 형성하고 인간이 먹이사슬의 최고정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간답게 살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은 자립할 수 없는 정치적 존재이며, 따라서 국가는 필연이라는 말이 수긍된다. 그러나 지금 이 땅의 정치인들만을 보면 마치 그 원시시대에 와있는 느낌이다. 우리 헌법 10조는 국민의 행복추구권을 국가의 목적으로 규정했다. 인간은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국가는 이를 보장할 의무를 가진다고 했다. 인간의 존엄이 최대한 지켜질 수 있도록 역할과 기능을 하는 것이 국가의 본질이고 존재 목적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국민의 행복과 존엄은 아랑곳없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만을 위해 피터지게 싸운다. 사사건건 편이 갈라져서 썩은 고기를 놓고 악다구니질 하는 형국으로밖에 비치지 않는다.

이런 지경이니 서로 어울려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란 영영 그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꿈꾸는 세상이 차라리 저러한 ‘나라 없는 나라’가 아니겠나. 차선책으로 자연에 파묻힌 ‘자연인’들이 늘어나는 까닭 또한 그러하리라. 시에서의 ‘나라’없는 나라가 무정부주의란 정치적 신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영세중립국과도 거리가 있다. 우리는 오래지 않은 과거, 시시때때로 불필요하게 국민을 강제하고 간섭하여 시민의 삶을 불편하게 했던 국가를 기억한다. 특히 국가 권력기관에 의해 국민들은 위축되고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아왔다. 그들의 독주와 오만은 개인의 삶에까지 속속들이 나쁜 영향을 미쳤다.

이제야 비뚤어진 권력기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고자 개혁의 기치를 내걸었고, 정보기관과 군부 등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권력기관의 핵심인 검찰과 사법 권력의 개혁에 박차를 가해야할 시점에서 완강하고 조직적인 저항에 부딪치고 있다. 검찰개혁이 성공해야만 자연스레 생활 밀착 권력기관인 경찰의 개혁도 완수될 것이다. 이는 정권의 이익이나 정략적 문제가 아닌, 민주공화국의 가치를 바로 세우는 시대적 과제이다. 일제강점기 검사와 경찰은 강압적 식민통치를 위해 복무하던 기관으로서, 불행히도 지금껏 국민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들며 독립투사를 탄압하던 그 ‘쿠세’가 일부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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