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대했던 꿈 어디가고 이룬 것 없이 사라져 되풀이 되는 역사 씁쓸한 뒷모습만

발행일 2019-09-23 20:00: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29> 효성왕

효성왕은 성덕왕의 둘째 아들로 귀족들에 의해 추대되었다 동생 경덕왕에게 왕위를 넘겼다

성덕왕 21년 733년에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울산과 경주의 경계지점이자 바다를 통해 들어오는 적을 방어하는 첫 관문에 관문성을 쌓았다. 경주와 울산 경계지점에 남아 있는 산성의 흔적. 관문성은 사적 48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울산과 경주 경계에 남아있는 관문성의 내성.
경주와 울산의 경계지점인 마우나오션리조트 입구 둘레길에서 보이는 관문산성 흔적.
신라 문무왕 시대에 김유신과 명랑의 제자 안혜 등이 호국사찰 원원사를 건립하고 동서 쌍탑으로 삼층석탑을 세웠다. 원원사는 사적 46호, 원원사삼층석탑은 보물 1429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원원사지 삼층석탑은 동탑과 서탑 쌍탑으로 조성되었다. 동탑은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원원사지 삼층석탑 중 서탑은 기단과 몸돌, 사천왕상까지 훼손이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다.
원원사 뜰에는 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원형석조가 남아 있다.
원원사 대웅전으로 오르는 돌계단은 신라시대 조성된 모습 그대로다.


경주와 울산 경계지역 7번 국도변에 남아 있는 관문성의 윗부분
마우나오션리조트 입구 둘레길에서 길게 이어지는 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관문성은 길이 12㎞로 신라의 만리장성으로 불렸다.
원원사삼층석탑은 기단에 12지신상이 새겨져 있고, 탑신에 사천왕상이 새겨진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다.
원원사지삼층석탑의 사천왕상 조각은 붓으로 그린듯 섬세하며 예술성이 뛰어나다. 두터운 부조로 새겨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하다.
신라 34대 효성왕과 35대 경덕왕은 32대 효소왕과 33대 성덕왕의 왕위 계승 과정과 너무나 닮았다. 효소왕과 성덕왕은 신문왕의 아들이자 형제다. 효소왕이 즉위 10년 만에 죽자 동생인 성덕왕이 왕위를 계승해 35년간 나라 살림을 돌봤다.

효성왕과 경덕왕 역시 성덕왕의 아들이면서 형제로 효성왕이 5년간의 짧은 기간 왕위에 있다가 물러나고 동생인 경덕왕이 왕위를 계승해 24년간 나라의 살림을 책임졌다.

두 형제 모두 처음에는 귀족들의 세력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성덕왕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데 성공하고, 차츰 왕권 강화를 위한 정책을 펼치려 했지만 역시 역부족이었다. 경덕왕도 성덕왕과 비슷한 입장이었다.

이러다 보니 효성왕도 효소왕과 같이 특별한 업적을 남기지 못하고, 동생에게 왕위를 넘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사라져 가야 했다. 삼국유사 효성왕조에 효성왕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성덕왕 당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 기록에 따라 관문성 이야기와 관문성과 관련된 원원사 이야기를 새로 쓰는 삼국유사에서 재구성해 본다.

◆삼국유사: 효성왕

개원 10년은 임술년(722)인데 처음으로 모화군에 관문을 지었다. 지금 모화촌은 경주의 동남쪽 경계에 속하고, 일본을 방어하던 요새이다. 둘레가 6천792보이고 높이가 5척이다. 일한 사람이 3만9천262명이며, 맡아서 한 이는 원진 각간이다.

개원 21년은 계유년(733)인데 당나라가 북쪽 오랑캐를 치고자 신라에 군대를 청하러 사신 604명이 왔다가 돌아갔다.

-역사: 관산성을 쌓은 722년과 당나라 사신이 다녀간 733년은 성덕왕 때이다. 성덕왕은 702년에 즉위해 737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효성왕은 성덕왕의 둘째 아들이다. 이복형인 태자 중경의 어머니가 폐위되고, 궁궐을 나가자 성덕왕에 이어 34대 왕으로 737년 즉위해 742년까지 5년간 왕위에 있었다.

효성왕은 김순원의 딸, 어머니의 동생인 이모와 결혼했다. 김순원 세력의 외압에 의한 강제적인 왕비 책봉이었다. 때문에 왕비에 대한 사랑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효성왕이 영종의 딸을 후궁으로 들여 사랑에 빠졌다. 그러자 왕비가 이를 질투해 후궁을 죽였다. 영종이 이를 빌미로 반란을 일으켰다.

효성왕은 외척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 미리 동생을 태자에 책봉했다. 효성왕의 동생이 35대 경덕왕이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관문성과 원원사지

-원원사(遠願寺)는 울산과 경주의 경계지점에 문무왕 당시 왜군의 침입을 막기 위한 호국사찰로 건립됐다. 김유신과 김의원, 김술종 등의 대신들과 밀교의 종파인 신인종을 신라에 들여온 명랑(明朗)의 후계자인 안혜, 낭융 등이 주축이 되어 세운 호국사찰이다.

사찰에서는 법회를 이어가며 국운을 강하게 하는 주문을 외웠다. 승려들은 주문을 외우는 공부를 하는 한편 무술을 익혀 뛰어난 병사로 양성되었다.

원원사지 동서 쌍탑은 가운데 석등과 함께 문두루비법을 펼치는 진법의 중심 설치물로 건립됐다. 삼층석탑의 상층기단 면마다 3구씩 십이지상을 새기고, 탑신에는 악을 물리치는 사천왕상을 입체적으로 두텁게 새겨 넣었다. 사천왕과 12지신은 불교의 대표적 신장상으로 불법을 수호함과 동시에 불국토인 신라를 수호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문두루비법이 펼쳐지면 신장들은 각자의 무기를 들고 구름을 타고 날아가 적들을 물리친다. 탑에 새겨진 신장상들은 지금도 금방 튀어나올 듯이 현실적으로 새겨졌을 뿐 아니라 붓으로 그린 듯이 섬세하게 뛰어난 예술성을 보여준다.

김유신과 김술종은 명랑이 사천왕사를 지어 당나라 대군을 방어한 법력을 지켜보고, 왜군들이 신라로 들어오는 길목인 경계지점에 호국사찰을 짓는데 직접 나섰다. 김유신은 당나라 군사를 막기 위해서는 사천왕사가 제 몫을 하고 있지만 왜군을 막기 위해서는 별도의 군사적 시설이 필요하다고 주장해 원원사를 서둘러 건립했다.

사천왕사는 양지스님과 명랑법사가 법회를 이어가고, 원원사에는 명랑의 제자 안혜와 낭융 등이 주지하며 호국불법을 펼치게 했다.

성덕왕 18년인 719년에 왜병들이 300척의 군함을 이끌고 신라를 침공해왔다. 당나라를 섬기면서 왜나라와는 교류를 단절하고 무시한다는 이유였다. 이에 명랑으로부터 술법을 이어받은 안혜와 낭융 등이 문두루비법을 시전했다. 이들의 술법은 법력이 약해 왜군 절반은 바다에서 침몰했으나 절반은 육지로 올라와 전투를 벌여야 했다.

-관문성: 성덕왕은 원원사의 법력을 보완하기 위해 치술령 줄기를 따라 울산 바다로 이어지는 띠처럼 12㎞의 장성을 쌓았다. 산과 산을 잇고, 계곡을 메워 성을 길게 쌓아 신라의 만리장성이라 불렀다.

성덕왕은 백성들의 안위에 관한 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성덕왕은 궁궐 내부에서 김순원과 김순정 형제가 득세해 온갖 모략을 펼치고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나서 정리를 하지 못했다.

단지 백성들의 편안한 삶을 위해 수시로 평복으로 갈아입고 암행에 나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필요한 정책들을 입안해 실천하곤 했다.

울산과 양남지역 등의 동해안에 왜구들의 침략으로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보고, 지역적으로 방어벽을 쌓아 올렸다. 만리장성을 쌓는데 동원된 인원이 4만 명에 육박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언덕을 등지고 성을 쌓았기 때문에 외벽에서는 15m 이상 높았지만 내벽에서는 대부분 쉽게 걸터앉을 수 있을 정도로 낮게 쌓아 성을 방어하기에 쉽도록 했다.

-성덕왕 18년 대규모 군함을 끌고와 노략질을 일삼았던 왜병들은 한 명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왜병들의 목을 수수깡 부러뜨리듯 꺾어버리는 장군이 있었다. 그는 특이하게도 적의 화살과 칼질을 막는 갑옷도 입지 않았다. 머리에 절간의 화부가 두르는 두건을 질끈 두르고 여자라 할 정도로 날씬하게 허리에 끈을 묶고 있었다.

기림사 광유선승의 절기를 이어받은 유천이었다. 유천은 김유신과 천관의 이름 첫 글자를 따서 천관이 몰래 낳아 기른 김유신의 아들이다. 유천은 본래 자질이 뛰어난 데다 기림사에서 글공부와 무학을 깊이 있게 갈고 닦아 성취가 높았다.

유천은 기림사와 골굴사로 이어지는 혈사에서 우연히 광유선승의 깨달음을 얻는 기연으로 환골탈태했다.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깊은 지경에 이르는 도학을 깨우쳐 몸과 마음이 자유로운 경지에 이르렀다.

천관이 죽음에 이르러 유신과의 관계를 차분히 일러 주었다. “네 아버지는 나라의 기둥이신 김유신 장군 이시다.”

유천은 어머니의 유언을 가슴에 품고, 김유신 장군이 완전한 삼국통일을 이루는 매초성전투에 참가해 먼발치에서 싸움에 승리할 수 있게 도왔다. 유천은 전투에서 입은 상처로 죽음을 맞는 아버지와 해후했다. 이어 아버지가 세운 호국사찰 원원사 화부로 들어가 나라를 지키는 일을 묵묵히 이어갔다. 왜구들은 유천의 용보다 크고 원귀와도 같은 움직임을 전해듣고, 백 년 간 원원사와 관문성 쪽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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