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 투 화산’ 해발 800m 자연의 품 안에 위치한 마을.||맨 손으로 이룬 가난한 개

▲ 7.6㎞에 이르는 산길을 올라야만 도착할 수 있는 군위군 고로면 화산마을은 1962년 정부의 개간 정책에 따라 형성된 마을이다.
▲ 7.6㎞에 이르는 산길을 올라야만 도착할 수 있는 군위군 고로면 화산마을은 1962년 정부의 개간 정책에 따라 형성된 마을이다.
▲ 군위군 고로면 화산마을은 7.6㎞의 산길을 올라야만 도착할 수 있다. 사진은 화산마을 운무.
▲ 군위군 고로면 화산마을은 7.6㎞의 산길을 올라야만 도착할 수 있다. 사진은 화산마을 운무.


▲ 화산마을은 1962년 개간에 들어갔다. 사진은 정착 당시 화산마을 모습.
▲ 화산마을은 1962년 개간에 들어갔다. 사진은 정착 당시 화산마을 모습.
▲ 정착 당시 화산분교.
▲ 정착 당시 화산분교.
▲ 화산마을은 주민의 아이디어로 황무지로 방치되었던 마을 부지 9천900㎡(3천 평)에 해바라기 밭을 조성, 공동 관리하고 있다.
▲ 화산마을은 주민의 아이디어로 황무지로 방치되었던 마을 부지 9천900㎡(3천 평)에 해바라기 밭을 조성, 공동 관리하고 있다.
▲ 화산마을 주민들은 지난날 배고픔을 기억하며 현재에도 매일 점심, 저녁을 마을 공동급식으로 해결한다. 사진은 주민들이 저녁식사를 하는 모습.
▲ 화산마을 주민들은 지난날 배고픔을 기억하며 현재에도 매일 점심, 저녁을 마을 공동급식으로 해결한다. 사진은 주민들이 저녁식사를 하는 모습.
▲ 화산마을은 지난 7월 출향인, 방문객들과 함께하는 ‘바람언덕 해바라기 잔치 한마당’을 채최했다.
▲ 화산마을은 지난 7월 출향인, 방문객들과 함께하는 ‘바람언덕 해바라기 잔치 한마당’을 채최했다.
▲ 화산마을 주민들이 지난 8월 농식품부가 주관하는 제6회 행복마을만들기 콘테스트에서 경관·환경부문 금상을 수상한 뒤 기뻐하고 있다.
▲ 화산마을 주민들이 지난 8월 농식품부가 주관하는 제6회 행복마을만들기 콘테스트에서 경관·환경부문 금상을 수상한 뒤 기뻐하고 있다.
▲ 군위댐과 산들이 내려다 보이는 화산마을 전망대.
▲ 군위댐과 산들이 내려다 보이는 화산마을 전망대.
▲ 화산마을 주민들이 조성한 해바라기 밭은 관광객들의 사진촬영 장소로 애용되고 있다.
▲ 화산마을 주민들이 조성한 해바라기 밭은 관광객들의 사진촬영 장소로 애용되고 있다.
‘맨손으로 이룬 가난한 개간촌의 60년 역사, 농촌의 새 희망 되다.’

구멍가게 하나 없는 오지 중 오지마을, 택배는 언감생심이다.

꼬불꼬불 7.6㎞에 이르는 산길은 지칠 대로 올라야만 도착할 수 있는 그야말로 자연의 품 안에 위치한 하늘 아래 첫 동네. 이곳은 바로 군위군 고로면에 위치한 화산마을이다.

‘누가 화산에 밭을 일구려 하는가. 신선의 근본은 여기서 시작되었는데. 여보게, 구름사다리를 빌려주구려. 옥정에 가을바람 불면 푸른 연꽃 따리로다.’

일찍이 선조는 화산의 가치를 미리 알아본 듯하다. 서애 류성룡이 화산의 자연경관에 반해지었다는 칠언절구는 마치 선견지명과 같이 바위에 남아 있다. 동틀 무렵 환상적인 운무의 아침인사는 마치 신선의 세계로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맨손으로 이룬 삶터. 60년 화산마을의 역사가 되다

화산에 마을이 생긴 역사는 오래되지 않았다. 화산마을은 1960년대 정부의 산지개간정책에 따라 180가구가 집단 이주하면서 형성됐다. 당시 마을 이름도 없었다. A, B, C, D 등 4개의 지구로 불리던 개간촌이다.

그 당시 불모지였던 마을에 터전을 마련한 초기 정착민들은 가난하거나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노인을 지게에 지고, 아이를 등에 업고,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이틀 꼬박 산길을 걸어 도착한 마을은 길도, 전기도, 수도도 없는 척박한 불모지였다.

주민들은 아직도 캄캄한 밤 신녕역에 첫발을 내디뎠던 1962년을 떠올리면 어김없이 두 눈에 눈물이 고이곤 한다.

이틀을 꼬박 걸어야만 외부의 세상과 닿을 수 있었던 이들은 외로움이 사무칠 정도로 컸기에 얼굴을 마주하는 이웃이야말로 든든한 버팀목이자 ‘비빌 언덕’이었다. 마을의 유일한 우물에서 물을 길을 때면 일렬로 줄을 서 누구도 정하지 않은 불문율로 공평하게 한 바가지씩 떠갔다는 이야기는 정착민들 사이가 가족 그 이상의 연결고리를 가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주민들은 지난날 배고픔을 기억하며 현재에도 매일 점심, 저녁을 마을 공동급식으로 해결한다. 어느 한 사람이라도 배고픔으로 인한 소외를 막기 위함이며, 함께하는 즐거움을 나누기 위함이다. 이렇게 긴 세월 서로 의지하며 오직 협동과 단결의 의지로 삽 하나, 괭이 하나, 톱 하나…. 그야말로 맨손으로 일궈온 삶의 터전은 화산마을 60년의 산 역사가 되었다.

◆눈물의 삶터. 그 자체가 원석이 되다

마을주민들은 유난히 길에 대한 애착이 깊다. 7.6㎞의 꼬불꼬불한 산길은 그 당시 주민의 힘으로 개척한 세상과 마을을 잇는 유일한 통로였다. 지금까지도 주민들은 이 길을 소중히 관리한다.

구역을 나눠 제초작업을 직접 하고, 겨우내 제설작업 역시 소홀히 하지 않는다. 억척스럽게 조성한 고랭지채소밭은 마을의 소중한 보물이 되었다. 오랜 세월 생계를 이어주던 눈물로 얼룩진 삶터는 점차 드넓은 자연 속에 녹아들어 그야말로 전국 유일, 화산마을만이 지닌 아름다운 경관이 되었다.

화산마을은 경관 이외에도 특이한 점이 있다. 지금껏 마을에 치매환자가 없다는 점이다. 사람이 가장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700고지에 마을 인가가 분포해 있다는 점과 사람의 오감을 자극하는 깨끗한 바람, 마음을 달래주는 풍광은 경관을 뛰어넘어 사람의 마음을 치유해주는 천연치료제가 된다는 것이 주민들의 믿음이다. 무엇보다 마을에 넘쳐나는 주민들의 청량한 웃음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화산마을은 과거 군부대 이전, 초등학교 폐교 등 소멸위기를 겪으면서 20여 가구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인구가 꾸준히 늘어 최근 5년간 인구 수는 41%, 귀촌은 58% 증가해 현재는 57가구 92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방문객 수 역시 3배 이상 급격히 증가하는 등 놀라운 변화로 이어지고 있다. 마을 일에는 정착민, 귀촌인 할 것 없이 모두 참여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정착민의 노하우와 귀촌인의 아이디어가 더해지면서 그야말로 시너지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올해에는 주민의 아이디어로 황무지로 방치되었던 마을 부지 9천900㎡(3천 평)에 해바라기 밭을 조성했다. 지난 7월 주민과 출향인, 방문객이 함께하는 ‘바람언덕 해바라기 잔치 한마당’도 개최했다. 인구감소와 고령화가 일반적인 현재의 농촌여건에서 화산마을의 변화는 농촌의 새로운 희망이 되고 있다.

◆대한민국이 인정하는 경관마을로 우뚝

이러한 노력으로 화산마을은 지난달 28일 농식품부가 주관하는 제6회 행복마을 만들기 콘테스트에서 경관·환경부문 금상을 받는 쾌거를 이뤘다. 주민들은 과거 가난하고 척박했던 마을을 일궈낸 개척민의 의지를 본받고 이를 농업유산으로 보전하고자 노력하는 주민들의 화합된 모습을 성과발표와 퍼포먼스로 녹여 내 큰 감동과 호평을 받았다.

이에 앞서 지난 7월에는 경북도 주최 행복마을 만들기 콘테스트에서 경관·환경 분야 대상을 받은 데 이어 농림부 콘테스트에서 또다시 1위를 수상함에 따라 대한민국이 인정하는 경관마을로 우뚝 서게 됐다.

화산마을 주민들은 스스로 하는 약속이 있다. 바로 ‘우리 마을은 우리가 지키자’이다. 마을경관 규약을 제정해 ‘지킴의 가치’를 실현하고, 자발적으로 화산경관 지킴이단을 구성해 주민 스스로가 경관활동가가 되고 있다.

이렇듯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살아가는 화산마을 주민들은 100년 뒤에도 그 이후에도 변함없이 구름과 바람, 노을, 별빛을 품은 아름다운 마을로 고스란히 보존되길 바라며 협력해 살아가고 있다.

이종은 화산마을 이장은 “무분별한 개발과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개발이라는 명분에 따라 마을이 훼손되거나 파괴되지 않도록 미래를 위한 약속을 반드시 실천하고 지금의 ‘화산다움’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진정한 농촌미학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배철한 기자 baech@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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