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박소현

골짜기 사이로 는개가 자욱하다. 소나무들은 무심히 고개를 숙이고 산새들은 몽환의 숲 속으로 숨어 버렸다.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 날것들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느린 걸음으로 산길을 오른다. 쪽지게에 한가득 짐을 지고 힘겹게 이 고개를 넘었던 그들에게 경배를 드린다.

보부상 십이령길 답사하던 날, 1구간 초입에서 오래된 비석 두 개를 만났다. 몸체는 낡았으나 글씨는 양각으로 또렷하게 새겨져 세월의 더께에도 의연하다.

‘내성행상접장정한조불망비(乃城行商接長鄭漢祚不忘碑)’

‘내성행상반수권재만불망비(乃城行商班首權在萬不忘碑)’

‘울진 내성행상불망비’다. 조선 말기, 이 십이령을 넘나들었던 보부상들은 봉화 사람 접장 정한조와 안동 사람 반수 권재만의 공덕을 기려 이 비석을 세웠다. 누군가를 잊지 않기 위해 세운 비라니…. 그들은 얼마나 많은 보시를 했기에 비석을 세우면서까지 은공을 갚으려 했을까?

문득 김주영의 소설 《객주》에서 정한조가 이끄는 ‘소금장수 행수 상단’의 왁자한 발소리가 생생히 들려오는 듯했다. 노동에 지친 보부상들의 거친 숨소리, 혹한에 바닷물을 길어와 소금을 굽다 연기에 눈썹마저 타 버렸다는 소설 속 민초들. 염전에서 만든 소금을 지고 비탈진 산길을 들숨 날숨 걸어갔던 소금상단. 그들의 혹독한 삶이 10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눈앞에 펼쳐진다.

십이령길은 경상북도 울진에서 봉화를 잇는 130리 고갯길이다. 울진에서 생산된 해산물들을 내륙으로 옮기는 유일한 통로였다. 보부상들은 미역이나 생선 등 해산물들을 쪽지게에 지고 이 험준한 자드락길을 걸어서 봉화 춘양장과 내성장 등으로 팔러 다녔다. 3, 4일을 꼬박 걸어야 겨우 봉화장에 도착했다. 내장까지 얼려 놓을 듯 사정없는 추위에도 등에는 진땀이 흐르는 혹독한 고통을 견디며 굽이굽이 이 열두 고개를 넘었다. 식솔들의 입에 들어갈 따뜻한 밥 한술을 위해 보잘것없는 삯전을 받으면서도 쉼 없이 걷고 또 걸었다.

가도 가도 길은 좀체 줄지 않았다. 발이 짓물러 짚신을 적실 정도로 피가 흘러도 채 닦지 못한 채 갈 길을 재촉했던 보부상들. 쪽지게를 벗지도 않고 선 채로 잠시 한숨 돌릴 뿐이었다. 첩첩산중에서 산적들을 만나 물건을 다 빼앗기기도 하고 발을 헛디뎌 수십 길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친 이도 부지기수였다. 얼마나 많은 보부상들이 이 길에서 스러져 갔을까? 그들이 지나갔던 골짜기마다 고달픈 삶의 곡절들이 파르르 고개를 들고 있다.

민초들의 피와 땀이 땅속 깊이 눈물로 새겨진 십이령길. 저 오래 묵은 나무들의 나이테에도 보부상들의 서러운 상처들이 옹이로 남았을 것이다.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결코 쓰러지지 않은 거친 생존의 무늬들이.

십이령길에서 오래전 기억 속의 어머니를 만났다. 새벽부터 이 마을 저 마을로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생선을 팔러 다녔던 40대의 젊은 어머니를. 생선이 가득 담긴 고무 함지박은 돌덩이처럼 어머니 머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암으로 오랫동안 투병하시느라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던 우리 집 살림살이. 집안일밖에 몰랐던 어머니는 슬픔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생선 행상을 나서야만 했다. 나와 동생을 중학교는 보내야 한다는 절박감이 어머니를 거리로 내몰았으리라.

“갈치 사소~~, 오징어가 싱싱해요~~.”

목이 쉬도록 외칠 수밖에 없었던 그 인고의 세월들. 밤이 되면 어머니 다리는 늘 퉁퉁 부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꼭두새벽에 일어난 젊은 아낙은 매일 부뚜막에 정화수 한 사발을 떠 올리고는 두 손 모아 자식들의 안녕을 빌었다.

보부상들이 무거운 짐을 진 채 위태위태 산길을 걸어갔듯 어머니는 생선을 머리에 이고 거리를 떠돌았다. 생의 긴 겨울이었다. 어머니가 종종걸음 쳤던 그 신작로에는 수없이 많은 어머니 발자국들이 화석이 되어 굳어 있을지도 모른다.

가난했지만 꿈마저 남루하진 않았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던 날, 한파로 온 세상이 꽁꽁 얼었던 그 새벽에 어머니는 내가 지원한 학교 교문에 갱엿을 철썩 붙여 놓고는 하염없이 머리를 숙였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공부 끈을 놓아서는 안 되는 기라!”

그때 그 어머니의 비장한 모습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내 머릿속에 죽비처럼 각인되어 있다.

내성행상불망비는 고종 27년(1890년)에 세워져 1995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310호로 지정되었다. 대부분의 비석들이 돌로 만들어졌지만 이 비석은 철로 만들었다. 보부상들은 일제시대엔 수탈을 막기 위해 비석을 땅에 묻었고, 6·25 때 역시 폭격을 피해 땅에 묻어 비석을 지켜냈다.

다시 비석을 본다. 켜켜이 쌓인 보부상들의 영혼이 말을 걸어온다. 보부상들의 울타리가 되었던 접장 정한조와 반수 권재만. 그 둘은 보부상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땐 사발통문을 돌려 그들의 상행위를 철저히 보호했다. 산길에서 만난 행려병자나 실족한 동년배는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고 목숨 걸고 구급했다는 보부상들. 그들에게는 송진같이 끈끈한 정과 결코 끊을 수 없는 의리가 있었다.

그들이 꿈꾸던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저들은 나와 무슨 인연의 고리로 얽혀 이 길에서 만나게 된 것일까? 겹겹이 쌓인 따뜻하고 징한 삶의 굴레가 안개처럼 온몸을 파고든다.

“가노 가노 언제 가노 열두 고개 언제 가노

소금 미역 어물 지고 내성장을 언제 가노”

보부상 십이령길을 걸으며 그들이 불렀던 타령 한 자락 읊조려 본다. 마음속에는 어머니를 위한 공덕비 하나 세우고 있다.









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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