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울진 봉평리 신라비||6세기 신라역사의 비밀을 간직한 울진봉평리신라비



▲ 대구경북서예가협회 이사장
▲ 대구경북서예가협회 이사장
1988년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에 거주하는 주민이 논에서 객토 작업을 하다가 옛날부터 그의 논에 박혀 있던 애물단지 큰 돌을 굴삭기로 파서 논둑에 버렸다.

얼마 뒤 비가 내려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석비의 흙이 씻겨 내리자 조경석으로 사용하려고 살펴보니 뜻밖에도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 석비가 발견 당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고비(古碑)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울진봉평리신라비(蔚珍鳳坪里新羅碑)이다.

법흥왕 11년(524)에 새겨진 것으로 알려진 봉평비는 1989년 발견된 냉수리비(503년)와 2009년 발견된 중성리비(501년)에 최고비의 왕좌는 물려주었지만 내용과 크기 및 서체미에 있어서 6세기 신라를 대표하는 석비로 자리 매김되고 있다.

현재 봉평비는 2008년 8월 봉평리 521번지에 신축된 울진봉평신라비전시관으로 옮겨 전시되고 있다. 전시관은 기존의 비각 바로 앞에 지어졌다. 봉평비를 찾아가려면 국도 7호선을 타고 북쪽으로 가다가 죽변교차로에서 우회전해 300m를 직진하면 시야에 전시관이 들어오고 동남쪽 지척에는 봉평해수욕장이 있다.

◆1500년 묵은 봉평비가 발굴된 사연

봉평비는 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 1월20일 세상에 비신을 드러냈다. 울진군 죽변면 봉평 2리 118번지 주두원씨 소유의 논에 비의 아랫부분 일부만 드러난 채 비면이 거꾸로 박혀 있어서 1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비교적 글자가 잘 판독된다.

같은 해 3월20일께 마을 이장 권대선씨가 농로에 방치된 석비의 흙이 봄비에 씻겨 내리면서 글자가 보인다고 면사무소와 군청에 신고했다. 담당 공무원은 경북도청에 보고했다.

4월7일 서예가인 윤현수씨가 울진군청 직원과 함께 초탁본을 떠서 서실에서 판독해 보니 임신서기석의 글자와 유사한 서풍으로 씌어진 서체임을 직감했다. 법흥왕을 지칭하는 매금왕과 신라육부라는 글자를 보고 신라고비임을 유추할 수 있었다고 한다.

4월15일 매일신문에 비의 발견상황이 보도됐고 4월16일 한국고대사연구회(한국고대사학회의 옛 명칭)의 교수와 전문가들이 비문을 탁본하고 현장조사를 했다. 5월5일 재조사 때 비를 캐내면서 떨어져 나간 비편이 현장에서 발견돼 완형을 갖추게 됐다.

7월22일과 23일 이틀간에 거쳐서 계명대학교에서 한국고대사학회 주최로 봉평비에 대한 학술회의가 개최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 4월께 출토된 위치에서 발굴 작업을 진행했으나 비좌(碑座)를 찾지 못해 8월에 비의 모형을 만들어 활용하도록 했다.

한편 한국고대사학회 학술대회에서 비의 정식명칭을 울진봉평신라비로 부르기로 했고 학술대회 결과를 이듬해 1989년 ‘한국고대사연구’ 2호에 특집으로 꾸며 간행했다. 이런 성과들이 모여서 마침내 울진의 어느 논에서 잠자든 봉평비는 문화재청에 의해 1988년 11월4일 ‘울진 봉평 신라비(국보 242호)’로 지정됐고, 2010년 12월27일 ‘울진 봉평리 신라비’로 명칭이 변경됐다.

◆ 신라사 연구에 소중한 금석문

봉평비는 신라 법흥왕 11년(524)에 건립됐다. 비의 석질은 변성화강암으로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며, 비의 제작 당시 이미 몇 군데 금이 나 있었기에 이를 피해 글자를 새겼다.

긴 세월을 땅속에 있었던 탓인지 고르지 않은 네 면 중 한 면을 다듬은 뒤 음각으로 글자를 새겨놓았기 때문에 원형의 파손이 그리 심하지 않다.

비의 높이는 204㎝, 윗너비 32㎝, 가운데 너비 36㎝, 밑너비 54.5㎝로 밑 부분은 비교적 둥근 편이고 전체 모양은 사다리꼴에 가까운 부정형(不整形)의 긴 사각형으로 비문의 글자는 세로로 배치돼 있다. 글자 수는 행마다 다르고 글자 사이의 간격도 차이가 난다. 전체 구성은 10행으로 현재 학계에서 판독한 글자 수는 399자이다.

서체는 예서에서 해서로 진행되는 과도기의 것으로 6세기 냉수리비나 중성리비 그리고 임신서기석의 글자와 유사한 글꼴을 보인다.

비문의 글자는 대체로 양호하나 이자체(異字體)가 많고 또 일부는 마멸돼 읽기 어려운 글자가 있다. 문체(文體) 또한 전형적인 한문식이 아니라 신라식의 독특한 한문을 사용해 해석하기에 애매한 곳이 적지 않다.

비문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비문의 요지는 법흥왕 11년(524) 1월15일에 법흥왕을 비롯한 14명의 중앙 고위 귀족들이 모여 명을 내린다.

직전 해인 523년 거벌모라(울진지역 중심지)와 남미지(울진지역촌) 지역이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는 과정에 울진주민들이 길이 좁고 험한 이야개성에 불을 내고 성을 침범하는 등 항쟁을 일으키자 신라에서는 이를 응징하기 위해 대군(大軍·중앙군)으로 반란을 진압한다.

신라육부는 사후처리로 칡소(얼룩소)를 죽여 피가 솟는 것을 보고 재판한다. 관련된 자에게 장 육십(杖六十)대와 장 백(杖百)대 등의 형벌을 내리고 만약 이와 같은 일이 있을 때에는 하늘에서 죄를 얻게 될 것임을 주지시킨 내용을 빗돌에 새겨 놓았다.

6세기 초에 고구려와 신라가 국경을 마주할 때 삼척이 최전선이었는데 바로 아래에 위치한 울진은 경주에서 도사(道使)가 파견돼 다스렸으나 신라와 친한 주민과 고구려와 친한 주민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신라의 중앙정부도 포상과 징벌을 적절하게 활용했으나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주민들은 불만을 가지고 반발하기도 했다. 봉평비는 이러한 당시의 실상을 그대로 기록한 역사적 산물이라고 여겨진다.

봉평비가 발견됨으로써 한국고대사 연구자들에게 부족했던 연구 자료를 제공하는 계기가 됐다. 왜냐하면 다른 신라비보다 글자 수가 많고 내용이 풍부해 문헌자료에 없는 새로운 내용이 들어 있기에 6세기 신라의 역사 연구에 도움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삼국사기의 율령반포 기록이 사실임이 확인되며, 신라 육부와 관등체계 및 지방통치조직과 촌락구조, 부(部)를 초월하지 못하는 왕권의 실태, 재판에 얼룩소를 잡았던 행위, 신라의 영역, 관료제도 등 법흥왕 때 신라의 정치·경제·사회의 다양한 시대상황을 광범위하게 파악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 비는 어떤 신라고비보다 귀한 금석문으로 평가되고 있다.

◆봉평비에서 느끼는 무기교의 기교와 무관심성

근대 시기 서구미학을 수용한 뒤 이를 기초로 한국미학의 정초를 놓은 한국미론의 선구자 고유섭(1905~1944)은 한국미술의 전통이라 할 만한 성격적 특성을 ‘무기교의 기교’나 ‘무관심성’ 등으로 규정했다.

기교나 개성이 강조되지 않았던 6세기 신라인들의 글씨, 구체적으로 봉평비의 글씨를 보고 있으면 고유섭의 미론에 동감하게 된다. 글자의 크기나 결구도 고려하지 않고 척척 써 내려간 치졸한 맛은 기교가 없는 듯 보이지만 살펴볼수록 은근히 기교가 녹아있음이 읽혀진다.

1500년 전 봉평비를 휘호한 사람은 인위적인 기교를 추구하거나 치밀한 구성을 위해 고민하지 않았다. 그들의 글씨는 바로 무기교 속에 고도의 기교가 스며든 궁극의 미학이라고 여겨진다.

무관심성은 언뜻 보면 세부적이고 세련되지 못해 거칠고 서툴러 보이지만 기계로 찍어낸 듯한 통일감을 추구하지 않고, 세부의 치밀하지 아니한 분위기가 더 크게 전체를 포용하는 구수한 큰 맛을 불러일으킨다. 봉평비는 자연석의 생긴 원형을 살려 글자를 배치하고 글자의 크기도 자유자재로 처리해 천진난만한 무관심성을 보여주니 노자가 말한 ‘대교약졸’의 멋이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

◆금석물의 보고인 울진봉평신라비 전시관

국보로 지정된 봉평비를 영구 보존하기 위해 울진군에서는 울진봉평신라비전시관을 건립해 제1전시실에 봉평비를 전시하고 있다.

제2전시실은 삼국시대의 비라는 주제로 신라 고구려 백제 등 삼국의 주요한 비 10기를 실물모형으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제3전시실은 금석문과 한글이라는 주제로 금석학의 계보 및 금석문의 역사,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비석의 양식과 특징 그리고 한자의 서체, 훈민정음의 창제와 보급 기록, 한글의 미래와 비전 등을 소개하고 있다.

전시관 뒤편에 조성된 야외비석공원은 우리나라 지도모양으로 조성됐다. 광개토대왕비, 신라 태종무열왕릉비, 원주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 등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국보 및 보물급 비석 25기가 실물 형태로 제작돼 전시되고 있다.

울진은 백암온천과 금강송에 월송정과 불영사로 널리 알려진 동해안 휴양관광도시이다. 그러나 하늘 맑은 가을날. 7번 국도를 달려 6세기 신라역사의 비밀을 여는 봉평비를 둘러보는 것도 마음을 살찌우는 좋은 역사문화여행이 될 것이다.

정태수(대구경북서예가협회 이사장)



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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