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경덕왕과 충담사||신라 경덕왕 충담스님과 떠난 대신들에게서도 백성 위한 정책 방향
성덕왕이 새 왕비를 맞아들이면서 뒤늦게 태어난 둘째 아들이 효성왕이다. 효성왕의 짧은 재위 기간에 이어 왕위에 오른 경덕왕도 귀족들의 정치세력 다툼에 따라 진행된 요식절차와 같았다. 그러나 경덕왕은 23년, 비교적 긴 시간을 왕위에 있으면서 왕권의 강화를 통한 안정적인 정치를 하려고 상당히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아들을 얻기 위해 왕비를 몰아내고 새로운 부인을 얻는 등의 상당히 무리한 정치로 신라 중기를 끝내고 하대로 이어지는 시대를 맞는 부덕한 왕이 되고 말았다.
충담과 표훈 같은 고승과의 대화에서 경덕왕의 백성을 위한 중흥정치와 말기정치로 이어지는 엇갈림을 본다.
당나라 사신이 도덕경 등을 보내와 왕이 예를 갖추어 받아들였다.
옹이 다스린 지 24년째였다. 5악과 3산의 신들이 간혹 어전의 뜰에 나타나곤 했다. 3월3일. 왕이 귀정문의 다락에 올라 주위 신하들에게 “누가 거리에 나가 좋은 스님 한 분을 모셔올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그때 마침 큰스님 한 분이 위엄 있게 잘 차려입고 서서히 걸어가고 있었다. 신하들이 그를 데려다가 왕 앞에 보였지만 “내가 말하는 좋은 스님이 아니다”고 했다.
다시 한 스님이 허름한 중 옷을 입고 앵통을 진 채 남쪽에서 왔다. 왕은 그를 보고 기뻐하며 다락 위로 불러오게 했다. 그 통 안을 보니 다구가 가득했다.
“충담이라 하옵니다.”
“어디 다녀오시는겐가?”
“저는 매번 3월3일과 9월9일에 차를 달여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께 드립니다. 지금 막 바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과인에게도 차 한 잔 주실 수 있는가?”
충담은 곧 차를 끓여 바쳤다. 차 맛이 특이했고, 찻잔에서는 기이한 향기가 자욱했다.
“짐은 일찍이 스님이 기파랑을 찬미한 사뇌가가 그 뜻이 매우 높다고 들었는데 과연 그러한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짐을 위해 백성을 편안히 잘 다스리는 노래를 지어주실 수 있는가?”
백성을 편안히 하는 노래 안민가는 다음과 같다.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하실 어머니요/ 백성은 어린아이라고 생각하신다면/ 백성들이 나라의 사랑을 알 것입니다/ 꾸물거리며 사는 백성들은/ 이를 먹임으로써 다스려져/ 내가 이 땅을 버리고 어디 가랴 하고 백성들이 말한다면/ 나라가 유지될 줄을 아실 것입니다/ 아,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처신한다면/ 나라 안이 태평할 것입니다.
구름 장막을 열어젖히매/ 나타난 달이/ 흰 구름 따라 가는 것 아니냐/ 새파란 냇가에/ 기랑의 모습이 있구나/ 이로부터 냇가 조약에/ 기파랑의 지니시던/ 마음의 끝을 따르련다/ 아아, 잣 가지 높아/ 서리 모를 화랑이시여.
경덕왕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명을 고치고 행정 관제를 정비했다. 사벌주를 상주로 고치고, 삽량주를 양주로 고쳤다. 청주는 강주, 한산주는 한주, 웅천주는 웅주, 하서주는 면주, 완산주는 전주, 무진주는 무주로 고쳐 지금의 지명으로 남아 있다.
관직명도 크게 고치고, 나라의 안녕을 위해 불국사, 석굴암을 지으면서 불교중흥을 꾀하는 한편 당나라와의 관계를 두텁게 하면서 유교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남루한 의복으로 경덕왕에게 나타나 안민가를 지어 바친 것도 일부러 백성을 위한 임금의 의지를 시험하고, 백성을 위한 정책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함이었다.
충담은 나라의 대들보로 기능하고 있던 화랑들을 격려하고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수시로 지도하는 일도 비밀스럽게 맡아 했다. 훌륭한 기파랑을 칭찬하는 노래를 지어 화랑들의 표상으로 삼게도 했다.
천재지변이 일자 상대등 김사인이 상소를 올려 정치의 잘잘못을 이야기하자 경덕왕은 이를 기특하게 여기고 받아들였다. 벼슬에서 물러나 있던 이순이 풍악을 즐긴다는 왕에 대해 충고했다. “제가 듣기로 중국 하나라 주왕이 술과 여자에 빠져 음탕한 오락을 즐겨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나라가 망했습니다. 앞에 가는 수레가 엎어지면 뒤의 수레는 마땅히 경계해야 할 것”이라 아뢰었다. 경덕왕은 이후 풍악을 그치게 하고 이순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물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