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돌/ 나희덕

움켜쥐고 살아온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놓고 펴보는 날 있네/ 지나온 강물처럼 손금을 들여다보는/ 그런 날 있네/ 그러면 내 스무살 때 쥐어진 돌 하나/ 어디로도 굴러가지 못하고/ 아직 그 안에 남아 있는 걸 보네// 가투 장소가 적힌 쪽지를 처음 받아들던 날/ 그건 종이가 아니라 뜨거운 돌이었네/ 누구에게도 그 돌 끝내 던지지 못했네/ (중략)// 오래된 질문처럼 남아 있는 돌 하나/ 대답도 할 수 없는데 그 돌 식어 가네/ 단 한 번도 흘러넘치지 못한 화산의 용암처럼/ 식어 가는 돌 아직 내 손에 있네



-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민음사,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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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자꾸만 좋아져야 하고, 그 개선은 때리면 울리고 울리면 변하여 그 변함에서 더 좋은 것을 찾아내리라는 변증법을 확신한 적이 있었다. 누굴 향해 차마 던지지 못했던 돌멩이 하나 이미 바스라지고 식어버려 나 또한 이젠 몇 가닥의 가는 손금만이 그 쥐어들었던 돌을 화석처럼 추억하노니. 나희덕의 시는 절제와 단정함이 조화를 이루어 ‘외유내강’ 무르지 않고 단단한 질그릇 같지만, 아닌 것은 끝내 아니라 말하는 강단도 느껴진다. 그는 지나간 날들에 대해 결코 ‘잔치는 끝났다’며 허탈해 하지 않는다.

‘던지지 못한 그 돌, 오래된 질문처럼 내손에 박혀있네’라며 여전히 끝나지 않은 과거를 오늘의 것으로 부여안는다. 돌을 쥐고 거리로 나서는 것부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건 종이가 아니라 뜨거운 돌이었네’ 무리에 몸을 던지지 못한 이유는 인간은 누구나 생각하므로 존재하기 때문이고, 그 생각의 질량 차이로 표출의 방식이 다를 뿐이다. 감정의 즉각적인 분출과 과잉이 반드시 ‘뜨거운 사람’을 형용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돌을 던졌던 사람들만으로 세상이 이만큼 좋아진 것도 물론 아니다. 식어가는 돌이지만 내 손안에 있다는 것, 그보다 뜨겁고 위협적인 힘이 어디 있으랴.

손아귀에 움켜쥔 그 힘만으로 세상이 정돈되기만 한다면, 그 편이 지극하고도 당연히 소망스럽다. 하지만 던지지 않고는 지켜야 할 가치들이 다 무너져버릴 다급한 상황이라면 제대로 목표물을 겨냥해야 할 것이다. 피가 끓지 않고서는 거리로 나서지도 손에 돌멩이를 쥐어들지도 못한다. 세월호 참사를 목도하며 분노하지 않은 국민이 어디 있겠으며, 박근혜 최순실의 국정농단에 참담해하지 않은 국민도 없었으리라. 인간을 굽어보는 신이 과연 존재하기는 할까라는 근원적인 회의에 빠지기도 하였다. 신의 가호가 실종된 지 오래다. 이제 우리 스스로 학습하여 그걸 거울삼아 세상을 바꿔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에 놓여있다. ‘정’과 ‘반’이란 모순된 개념이 충돌하여 ‘합’을 이루고, 그 과정을 되풀이하며 인간의 정신과 현실의 역사가 진보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나라를 혼란의 늪으로 빠트리는 것은 아닐까 정치권과 권력집단을 우리는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다. 이를테면 검찰이 개혁되고 수사권을 잃게 되면 힘이 빠지고 영향력도 축소될 것이므로 훗날 변호사 개업을 해도 수입이 줄 것이라는, 그래서 그들을 움직이게 했다는 가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국민들로서는 가능하면 갉지 않고 나서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정치권과 권력기관은 새삼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인식을 가져야 할 때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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