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같은 가을이 / 최승자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매독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 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폐수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 시집 『이 時代의 사랑』(문학과지성사,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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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가을’이라니. 시를 행복한 꿈의 한 양식이라 믿고서 낙천적인 언어습관에 길들여진 이들에겐 참으로 난폭하고 도발적이며 냉소적인 직유다.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는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다’라고 했던 시인. ‘세월은 길고 긴 함정일 뿐이며 오직 슬퍼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며 서슴없이 저주받은 운명을 말하던 시인. ‘내가 살아있다는 건 루머’라고 했던 그가 지독한 절망의 끝에서 본 가을은 신산하기 그지없다. 건조해져가는 산과 차가워지는 바람의 우울, 낙엽의 조락처럼 쓸쓸한 풍경들이 이유 없는 고통으로 체험될 때 가을은 더 이상 아름다움으로 칭송되지 않는다.

깡마른 풍경으로 사물들은 방치되고 몸과 마음의 운신 또한 덩달아 힘겨우리라. 누구도 연결해내지 못하는 언어만이 꿈과 현실에서 떠나간 애인들을 기억할 뿐. ‘말 오줌 냄새’를 풍기며 폐수로 고이는 가을이란 막다른 현실. 그 끝에서 황혼을 업은 강물이 마비된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찾아가는 바다. 그 바다가 기어이 자신을 죽이고 말 것을 믿으므로 더없이 충만한 고통 속에서 묻는다. 여기가 어디냐고. 언제쯤 이 불구의 마음과 지류의 삶이 무한의 바다에서 죽음처럼 고요해질 수 있느냐고.

마음에 추를 달아 끝없이 추락케 하는 ‘개 같은 가을’에 나는 무엇이냐고. 참을 수 없는 아픔이 구차하게 번져가는 ‘매독 같은’ 저주의 가을로 한달음에 달려가지만, 그 풍경 다 받아내지 못하는 나는 도대체 뭐냐고. 이 시대의 사랑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은 채 개처럼 쳐들어온 가을을 맞아야 하나. 지난 시대의 추문들에 일일이 분노하기에도 지쳐 삶은 허무로 깊게 패이고 있다. 수확할 게 없는 이들에겐 절망이 낙엽처럼 쌓일 것이고 사랑받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철저한 소외의 계절이 될 것이다. 풍경은 아름답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밝게 웃을 것이나 몸과 마음의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겐 ‘개 같은 가을’이다.

‘허무의 사제’ 최승자 시인은 오직 자기 모욕과 자기 부정과 자기 훼손의 방식을 통해서만 존재했다. 그는 세상을 혹독하게 앓으며 시를 과격하게 써댔다. 그러나 시로는 ‘밥벌이를 할 수 없고 이웃을 도울 수도 없고 혁명을 일으킬 수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개 같은 가을’에 ‘절망의 끝, 허무의 끝, 죽음의 끝까지 가봤던’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것을 우두망찰할 밖에. 이 개 같은 가을도 혼란의 연속이다. 하지만 데카르트처럼 전부가 의심스러울지라도 의심하는 나 자신은 반드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명제를 부여안고서 이 가을을 견뎌도 좋을까. 강물이 바다에 이를 수 있을까.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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