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사계를 만나다’

발행일 2019-10-07 20:00: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장려상 노정옥

쪽빛 바다를 따라 길이 펼쳐져 있다. 이름하여 ‘파도 소릿길’이다. 벼랑같이 일어서 달려오는 파도가 해안 끝에서 스러진다. 쉴 새 없이 밀고 당기는 보이지 않는 힘은 바다의 말없는 용틀임일까. 속내 깊이 엎드린 기억들이 꿈틀대며 일어선다.

바닷길 언덕에는 온갖 여름꽃이 군락을 이루었다. 개망초, 나리, 메꽃, 달개비……. 함께, 때로는 각각 살아내는, 저마다 다른 색깔로 채색되는 들꽃 같은 우리네 인생. 뜻하지 않은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답을 찾은 철학자처럼 잔잔한 희열에 빠져든다.

경주시 양남면에 위치한 주상절리는 여태껏 감추어 오던 비경의 암석이다. 절리란 화산 분출로 인해 지표면에 흘러내린 용암이 식으면서 오랜 풍화작용을 통해 이루어졌다. 수억 년 전, 육지로 치솟은 불기둥과 몰아치는 바람, 억겁을 견뎌낸 바닷물이 빚어낸 걸작품이다.

국내외에 산재해 있는 절리는 수직기둥 또는 단일 형태이다. 그에 반해 바다에 뿌리를 내린 경주 주상절리는 다채로운 형상을 이루고 있다. 운 좋게도 나는 이곳에서 인생 사계를 발견하게 된다. 횡과 종, 사선과 곡선의 형태는 마치 인간이 겪는 다양한 삶의 의미를 품고 있었으므로.

출렁다리를 건너 맨 먼저 눈에 띈 것이 부채꼴 주상절리다. 골 깊은 주름이 무지개처럼 펼치고 웃는다. 시린 세월과 한여름의 뜨거운 열정을 쓸어안을 수십 폭의 주름치마인가. 하늘 궁전에서 실수로 떨어뜨린 대형 부채인가. 저곳에 큼직한 손잡이를 처억 매달고 부친다면 폭염도 순식간에 물러가고 태풍조차 불러오지 않을까.

꽃향기가 층층이 배인 나무계단을 따라 다음 절리로 향한다. 위로 솟은 주상절리와 기울어진 주상절리를 차례로 만난다. 얼핏 보면 위로 솟은 절리는 현대식 빌딩을 떠오르게 하지만 더 깊이 살피면 위무도 당당한 젊은 병사들의 사열대를 닮았다. 태양에 그을린 체구로 수만 년 세월을 지키며 수평선을 응시해 온 그들은 동해를 지키는 성채이다. 가까이 귀를 대면 용사들의 함성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다.

바닷길 끝자락에서 반쯤 기울어진 주상절리와 마주쳤다. 손을 쭉 뻗으면 바로 만져질 것처럼 가깝다. 육지를 등으로 삼고 비스듬히 바다로 기울어진 절리의 한쪽 끝이 먼 수평선을 향하고 있다. 물살에 부대껴 온몸이 검추레하다. 바위는 무언가를 성취하고자 무거운 짐을 지고 시름에 젖은 듯도 하고, 기지개를 켜며 벌떡 일어서려는 중년의 여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쏟아지는 태양을 민낯으로 받아낸 세월 탓일까. 검게 탄 각목을 쌓아 올린 형태의 누운 절리는 잘 설계된 균형미를 자아낸다. 거친 세상을 불타는 열정 하나로 겁 없이 달려들었던 젊음의 시간들을 내려놓고 이젠 하늘을 마주한 채, 다가오는 고요를 맞이하려는 평화가 있다. 내 마음도 따라 눕는다. 파도와 바람소리만이 나직이 수런거린다.

들어올 때 미처 못 보았던 빨간 우체통 하나가 서 있다. 아이들은 까치발을 하고 뭔가를 적은 엽서를 우체통 속에 넣는다. 전자 메일과 휴대 전화로 안부를 묻는 것이 요즘 세태이지만, 손으로 쓴 글만큼이나 가슴을 적시는 것이 있을까. 나도 어린 마음이 되어 편지를 쓴다. 오늘의 설렘과 그리움이 봉인된 이 시간은 낡음도, 늙음도 없이 언젠가 내게 배달되리라.

돌이켜보면 내 삶에도 사계가 있었다. 부채꼴 시절에는 꿈을 좇는 유년기의 희망이 판타지처럼 펼쳐졌다. 한 부모를 잃기 전에는 보배로운 품안에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새싹 움트는 연둣빛 봄날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어릴 때 엄마 없이 자란 아이가 아닐까. 끝없이 내어주어도 도무지 아까운 줄을 모르는 절대의 사랑, 그 조건 없는 애정을 받아보지 못하고 자란 나의 어린 날은 늘 춥고 외로웠다.

위로 솟은 주상절리의 청년 시기는 이상과 현실의 끊임없는 충돌이었다. 남들은 청바지 차림에 통기타를 메고 캠퍼스를 누빌 때, 나는 삶의 연장을 들고 한여름 뙤약볕 속으로 뛰어들었다. 나이팅게일의 숭고한 봉사정신을 받들고서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선 사람들과 마주하며 청춘을 힘겹게 펌프질해 갔다.

반쯤 기울어진 절리의 형상처럼 중년의 시기는 굴곡진 일상의 연속이었다. 희비의 곡선은 언제나 맞장을 떴다. 일찍이 시어머니를 여읜 무일푼 장손 집안의 맏며느리였던 나는 남편의 사업이며 감당해야 할 집안 대소사에 마음이 항상 지뢰밭을 걸었다. 운명(運命)에서의 운(運)은 사람이 조정할 수 있지만 명(命)은 하늘의 뜻을 받는다고 했다. 그 운이라는 것을 만들고 보듬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얼마나 거리를 숨차게 뛰어다녔던가.

이제 누운 시기인 초로에서 문학의 세계를 만났다. 문학은 알게 모르게 겉모습을 덧칠하며 전전긍긍했던 시간들을 모두 내려놓게 만들었다. 문학이 내어 준 넉넉함으로, 귀퉁이에 선 누구에게라도 따뜻한 마음 한 조각 내어주고 싶다.

눈을 감는다. 인생의 사계처럼 절리의 모습이 삶의 밀물과 썰물처럼 상연된다. 때로는 의연하고 때로는 움츠린 형상이 우리네 인생 사계와 어찌 그리 닮았을까.

밀운불우(密雲不雨)라는 말이 생각난다. 구름이 물을 잔뜩 머금고 있는데 비를 뿌리지 못하는 경우처럼, 모든 일에는 정한 때가 있다. 서 있을 때가 있으면 누울 때가 있고, 나아갈 때가 있으면 멈출 때가 있다는 것을. 세상은 변함없이 변하고 우리네 삶도 피고 지는 자연의 질서 속에 흘러간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 알겠다.

수평선을 바라본다. 물새 떼의 울음이 파도를 몰아가는가 싶더니 바람마저 구름을 몰고 간다. 사람들의 발걸음도 잦아진다. 부채를 접듯 잡다한 상념을 접으며 적막해진 해안 길을 빠져나온다. 사랑하는 연인을 두고 온 것처럼 자꾸만 뒤가 돌아다 보인다.

어쩌면 생은 사계를 통과해야만 하는 지루한 싸움이 아닐까. 하지만 꿈을 품은 자에게 삶은 끝까지 희망, 그래 희망이리라.

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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