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사에서 바다를 건너다

발행일 2019-10-15 20:00: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장려상 이수진

계곡을 따라 호젓하게 걷는다. 오늘은 그저 도시의 속도에서 비켜 나와 인적 드문 산사에 숨어들고 싶은 마음뿐이다. 어느새 비는 그치고 녹음의 새벽이 시간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천년 고찰 앞에 아침이 열리고 있는 중이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는 땀방울마저 실로 오랜만의 느낌같이도 생경하게 느껴져 지난밤 통증이 사라진다. 언뜻언뜻 오래된 소나무 숲 사이로 새벽이 얼굴을 내밀 때 비도 함께 후드득 떨어진다.

누운 소나무를 보며 들어선 문이다. 야트막한 담장마저 그저 흔한 돌로 보이지 않으며, 흔한 일주문도 아닌 그렇다고 사천왕상의 우락부락한 얼굴이 길을 막는 문도 아니다. 여념 집 문 같은 문을 들어선다. 하지만 그 문을 들어선 이상 부딪히고 상한 마음 어디든 걸어 놓으라고 마주한 소나무는 더 낮게 더 넓게 뻗는다.

“에고 늦어버렸네”

처진 소나무를 지날 때 거친 숨 사이로 신음처럼 들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헐떡이며 올라온 여인은 숨을 갈무리하지도 않은 채, 무릎을 꿇고 오래도록 합장을 한다. 꼭 저 소나무를 닮았다. 딱히 어디를 보고 하는 것도 아닌 저 지극한 염원. 대웅보전과 비로전, 아니면 만세루와 오백 전 사이. 그도 아니면 후박나무와 둥근 법륜을 보는 것일까? 그렇게 간절하게 비는데도 뚜렷한 좌표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멀리 붉은 해가 처연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그때 알게 된다. 간절하게 빌고 또 비는 일이란 어쩌면 가득 찬 것을 비우고 또 비우는 일이라는 것을. 아까보다 더 편안해진 여인의 얼굴을 보며 깨닫는다.

느린 걸음으로 운문사 대웅보전을 지나 비로전까지 오래 걷다 멈춘다. 풍경을 호흡하다 천년의 세월을 다 받아낸 비로전의 빛바랜 단청을 보며 숨을 멈춘 곳이다. 단청과 단청 사이에 새겨진 후불 벽화들을 찬찬히 보며 들인 숨을 내뱉는다. 비로전의 내부는 입체감 있는 나무들이 양각과 음각으로 교차되면서 시공간의 구분을 모호하게 한다. 각 면마다 문과 벽화로 모양을 내어 마치 그 자체가 물결치는 바다 같기도 하고, 바다에 떠 있는 큰 배 같기도 하다. 그 웅장한 법당에서 두루 빛을 비추는 비로자나불의 손은 무언가 할 말이 많은 양 자꾸만 멈칫거린다. 너무나 인간적인 대일여래 불상의 주저하는 모습에 왈칵 눈물이 솟구친다. 순간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 천장을 올려다보며 쏟아지는 눈물을 피해 보려 애쓴다. 알 수 없는 통증을 이기려고 나선 길에서 돌연 마주한 불상의 손잡음과 갑작스러운 눈물이라니. 그리고 그때 밧줄을 잡고 매달려 있는 동자의 모습을 환하게 아침이 오는 비로전의 천장에서 본다.

“악착 보살을 보신 거군요. 인연이 깊으십니다.”

지나던 스님께서 서쪽 천장에 매달린 반야용선을 가리킨다.

“반야용선은 어지러운 세상을 넘어 피안의 극락정토에 갈 때 탄다는 배를 말하지요. 법당 자체가 지혜의 세계로 나아가는 반야용선과 같다고 하는데, 보고 있는 것처럼 반야용선에 밧줄이 하나 걸려 있고, 그 밧줄을 잡고 매달려 있는 동자상을 악착 보살이라고 하지요.”

엊저녁부터 여름을 알리는 비가 내렸다. 도시의 비는 슬픔같이, 아픔같이, 그리고 긴 그리움같이 누군가의 물기 어린 기억을 끄집어내며 내렸다. 작업을 독촉하는 전화와 촉박한 시간들이 이어지며 나는 내리는 비처럼 아팠다. 도대체 인간들이 왜 이렇게 자신만을 생각하느냐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이기심을 들춰 보였다. 사람들에게 상처받았고 그런 만큼 사람들이 궁금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았다. 할 말이 많은 사람들, 들어주기만 해야 하는 사람들, 그러다 조금이라도 내 목소리를 내면 돌아서는 사람들. 견딜 만큼의 긴 불행을 겪다가 아주 잠깐의 행복이 바람처럼 스칠 때 우리의 삶의 대차대조표는 완성된다고 믿었다. 갑과 을이 명확한 자본주의사회에서 을은 갑의 얘기를 경청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잘 참았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나의 거래처는 안전하니까,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까?

어느새 나는 인연이 깊은 배를 올라타고 바닷길을 바라보고 있다. 순풍에 쌍돛대는 바람에 펄럭이고, 신이 난 용은 눈알을 부라리며 용맹스럽게 고통의 바다를 훌쩍 건너 열반에 다다른다. 푸른 물결 사이로 연꽃이 군데군데 보인다. 특히 나의 눈 속에서 움직이는 바다는 결코 험난하거나 격정적인 바다가 아니다. 오히려 물결은 연꽃처럼 선이 곱다. 나아가고자 하는 곳으로 잘 가고 계시지요? 갑자기 스님의 질문에 푸른 바다를 표류하는 조난자가 된 것 같다. 그때 누군가 내민 밧줄이 고마워 나는 팔을 뻗어 그것을 움켜쥔다. 악착같이.

지금까지 불화나 벽화가 딱히 이렇다 할 인상을 남기지 못한 것은 어느 절에나 있을 것 같은 통일된 포스터처럼 느껴진 것도 그런 이유였다. 하지만 오늘, 운문사에서 본 반야용선은 확실히 지금까지와는 다르다. 보통의 벽화처럼 강렬한 원색을 가진 것도, 그렇다고 눈에 띄게 크기가 큰 것도 아니다. 정교하고 아름답게 불상 위 천장에 매달려 부처님을 장엄하고 있지만 법당 안 천장에 있는 데다 조명이 제대로 없어, 일반인은 물론 불교 신도들마저도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어떤 것에 쉽게 눈길을 주는 이도 아닌 내가 악착 보살을 본 것은 인연이 닿은 탓이리라.

분명 저 매달린 보살은 안전하게 극락정토에 닿은 듯 보인다. 그저 화려하고 웅장한 벽화의 여러 모습보다 더 큰 울림이 느껴지는 것은 그 보살이 어쩌면 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천년의 시간 동안 중생들을 극락정토로 건네주기 위해 천장에 매달려 바다를 건너온 반야용선은 그러니까 여전히 바다를 건너는 중이다. 참된 지혜와 깨달음을 얻은 중생을 위해 빛은 바랬어도 반야용선은 고해의 바다가 아닌 진정 맑고 푸른 바다를 건너 극락정토에 이르게 하고자 하는 마음 그대로 더욱 아름답고 아련한 인상을 남긴다.

적어도 지금 나에게 그립고 간절한 삶의 파도를 불러일으켜야 할 때임을 악착 보살은 직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속 깊은 진짜 그리움과 간절함의 대상을 떠올려 다시 한번 힘을 내어 그것을 꽉 잡아보라고 말한다. 운문사 비로전 서쪽 천장에 매달린 악착 보살 앞에서 나는 참 오래도록 머물러 있었다.

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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