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눈/ 정다혜

간호사는 의식 없는 내 엄지손가락으로/ 내 눈 한쪽 들어내겠다는/ 수술동의서에 도장 찍었다/ 그건 동의가 아닌 최후의 통보/ 나는 여자답게 거부해 보지 못하고/ 절망의 비명 한번 질러보지 못하고/ 서른다섯에 눈 하나 잃었다/ 그렇게 빠져나간 생의 빈자리/ 신경조차 차단된 죽음의 빈자리에/ 보지 못하는 새 눈 들어섰지만/ 그 눈에는 더 이상 풍경 담을 수 없었다/ 기쁨도 슬픔도 모르는 의안/ 아무것도 채울 수 없는 깜깜한 고요 속에/ 다행히 눈물샘은 마르지 않아/ 바다 같은 눈물 출렁출렁 퍼내 쓰고도/ 눈물은 아직 강물처럼 남아 펑펑 흐른다/ 외눈의 절망은 두 눈으로 보는 세상/ 한 눈으로 보아야 하는 것/ 외눈의 축복은 두 눈으로 보는 세상/ 한 눈으로도 볼 수 있다는 것/ 지구가 한 눈으로 우주를 다 보듯이/ 나는 외눈으로 나의 우주를 보았다 (후략)

- 시집 『스피노자의 안경』 (고요아침.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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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력의 불편을 겪어보지 않으면 눈의 소중함을 느끼기 어려운데, 요즘은 그 소중함을 모른 척 하기가 어려운 세상이다. 세상이 번잡스럽고 컴퓨터와 휴대폰의 전자파에 일찌감치 노출되어 일찌감치 시력 보조도구에 의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 몸에 불필요한 기관은 없다. 그 가운데 눈은 신체 중 가장 예민한 기관이며 눈의 피로는 몸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건강한 생활을 위해 눈의 건강은 필수이다. 나도 어느 날 갑자기 한쪽 눈이 부옇게 보여 안과에 갔더니 백내장 진단을 받고 난생 처음 수술이란 걸 받은 바 있다.

시인은 30년 전 뜻하지 않는 교통사고로 졸지에 한쪽 눈과 사랑하는 딸을 동시에 잃었다. 그리고 1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수술을 거쳐 오늘까지 힘겹게 살아남았다. 시인은 오직 시를 통해 그동안 한 번도 소리 내어 울어보지 못하고 삼켰던 울음을, 그리고 딸에 대한 죄스러운 감정을 토해내곤 했다. 그러나 시인은 이런 고통 속에서는 “잃어버린 한쪽 눈보다 더 밝은 빛이 되어주는 스피노자의 안경”과 같은 남편이 있기에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일에 대한 희망으로 눈을 반짝인다.

시인은 ‘외눈의 절망은 두 눈으로 보는 세상/ 한 눈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외눈의 축복은 두 눈으로 보는 세상/ 한 눈으로도 볼 수 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여기며 지금껏 살아오고 있다. ‘지구가 한 눈으로 우주를 다 보듯이’ 시인은 ‘외눈으로 나의 우주를 보았’던 것이다. 요즘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정 모교수의 경우도 젊은 나이에 한쪽 눈을 잃는 끔찍한 일을 당한 뒤 외눈을 가지고도 끄떡없이 살아내기 위해서 얼마나 공전과 자전을 거듭했을까 짐작된다. 죄가 없다면 ‘외눈’으로 맞이하는 ‘축복의 봄’은 반드시 오겠지만...

매년 10월 둘째 목요일로 지정되어 실명과 시각장애에 대한 인식을 알리기 위해 제정된 ‘세계 눈의 날’이 어제(10월10일)였다. 그리고 11월11일도 또 다른 ‘세계 눈의 날’이다. 특히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빈번히 찾아오는 황반변성은 치료시기를 놓치면 자칫 실명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눈의 날을 맞아 실명질환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야할 것이다. 나도 양안의 백내장 수술로 전보다 보기가 나아졌지만 당뇨성 망막변증이 또 걱정된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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