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거장에서의 충고/ 기형도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중략) 그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 담아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 기형도 전집 (문학과지성사,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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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으며 배경음악으로 김현식 버전의 ‘이별의 종착역’을 듣는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외로운 이 나그네 길. 안개 깊은 새벽 나는 떠나간다 이별의 종착역...’ 노래방의 내 후순위 애창곡이기도 하다. 시인의 비극적 세계관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이 시는 인간의 실존적 불안에 시달려온 시적 화자(이런 표현은 가급적 쓰고 싶지 않지만)의 심경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그간 많은 길을 찾아 헤매었으나 황량한 추억과 상실감만을 안고서 마음의 한 정거장에 당도한다. 어쩌면 죽음 쪽으로 발길을 옮기려는 상태를 우울하면서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와’ ‘저녁의 정거장’에서 서성거리나 이미 집으로 돌아갈 길은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고 추억은 황량한 상태에 놓여 있다. 그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몰려와 멎고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대뜸 시의 첫 행에서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고 했다. 실존하는 희망의 길을 찾기보다는 죽음을 예감했던 것은 아닐까? 시에서는 시종 어떠한 희망의 조짐도 보여주지 않고 오히려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가고’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으며’ ‘그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기’만 하다.

결국은 지금껏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시인은 이렇게 쓰고 있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오고,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니’ ‘주저앉으면 그뿐’이라고. 이제 더는 불안 따위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니 시인은 그것을 희망이라고 그랬는지 모르겠다. 나뭇잎과 우주와 자연의 비밀을 캐내려 했으나 끝내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채 홀연히 닫히고 만다. 이번 조국 장관의 돌연 사퇴를 보면서 한편으론 차라리 잘 됐다 생각하면서도 더러운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프로이트는 그의 정신분석학에서 사람에겐 ‘죽음의 본능’도 있다고 했다. 그는 원초아(Id), 자아(Ego), 초자아(Super-Ego)란 성격의 3층 구조를 말했다. 이드는 본능, 자아가 본능 조절능력이며, 초자아는 양심이라고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 자아가 이드의 힘을 통제하고, 그 자아를 초자아가 감시한다. 초자아는 자신을 비판하고 냉정하게 평가하며 죄책감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엄격한 도덕적인 행동을 하게 한다. 그러나 몹시 독한 초자아는 인간을 자학하게 만든다. 이럴 때 심각한 자살충동이나 자기파괴 욕구를 유발하기도 하는 것이다. 조국에게도 그 초자아가 툭툭 치고 지나갔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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