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말 가죽/ 문인수

법원 앞 횡단보도 도색은 늘/ 새것처럼 엄연하다. 흑.백.흑 백의 무늬가/ 얼룩말 가죽, 호피같다. 이걸 깔고 앉으면, 치외법권/ 산적 두목 같을까, 내 마음의 바닥도 때로 느닷없이/ 뿔처럼/ 험악한 수피가 되고 싶다. 나는/ 이 거대한 늑골 같은 데를 지날 때마다 법에/ 덜커덕 덜커덕 걸리는 느낌이다/ 인간이 참 제풀에 얼룩덜룩한 것 같다// 저 할머니는 이제/ 법이란 법 다 졸업한 ‘무법자’ 일까/ 신호등 빨간 불빛 따위 아랑곳없이/ 무인지경의 횡단보도에 들어선다/ 강 건너듯 골똘하게 6차선 도로를 횡단해 간다. (중략) 어려 보이는 한 교통순경이 냉큼/ 쫓아가 할머니를 부축해 정성껏 마저 건너간다/ 덜컹거리는 법 감정이, 시꺼먼 길/ 바닥이 문득 흰 젖 먹은 듯 고요히/ 풍금처럼 흐르는 저, 모법(母法)이 있다.

- 시집 『배꼽』 (창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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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 게 아니라 도색이 선명한 흑백 횡단보도를 보면 얼룩말 무늬 같다. ‘법원 앞 횡단보도’의 흑백 얼룩무늬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위법과 준법, 불의와 정의, 인치와 법치 따위의 대칭일 수도 있고, 시민 권력과 그 대척에 있는 사법 권력을 의미할 수도 있겠다. 법치도 좋고 사법 권력도 좋은데,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보편타당성, 집행의 투명성, 정의에 대한 복종, 예측가능성의 제공, 합리적 과정을 통한 사법 환경의 개혁 등이 전제되어야할 것이다. 법질서 확립의 형태가 정부나 검경, 법원의 자의적 법해석과 법적용으로 전개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법치는 국민들이 법을 잘 지키고 준수해야한다는 말이 아니라, 국가와 권력자들이 법에 따라 통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법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국민들이 법을 무시한다는 뜻이 아니라 통치자의 개입과 검찰 등이 자의적으로 남용한다는 말이다. 지난 정권을 들추어보자면 퍼뜩 이명박 정부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명박산성과 촛불집회 탄압, 불매운동 처벌, 공안사건 획책, 미네르바 구속, 용산 참사 초래, 집시법 개악, 사이버모욕죄 등 온라인 탄압, 기타 MB 악법 추진 등 그 퇴행적 법치 행각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그런 정부를 윤 검찰총장은 자기가 경험한 바로 가장 ‘쿨한’ 정권이라고 했다. 힘이 다 빠진 정권 말기에 구체적 증거가 세상으로 다 드러난 사건의 사례를 들어 그딴 식으로 발언하는 윤 총장의 태도는 분명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런 그에게서 정의감이나 균형감각은커녕 손톱만큼의 역사의식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야말로 망나니 완장을 찬 ‘산적 두목’같다고나 할까. 그의 ‘정무감각 없다’는 말은 ‘난 무대뽀’라는 말로 들리고,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은 ‘국민들에게도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로 다시 들린다.

법치를 앞세운 이명박 정부의 폭압적 사건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하고 지금도 분노한다. 그 시절이 좋았노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검찰총장에게서 우리는 섬뜩함을 느낀다. 죄를 짓지 않아도 ‘이 거대한 늑골 같은 데를 지날 때마다 법에 덜커덕 덜커덕 걸리는 느낌이다.’ 까닥하다가는 없는 죄도 뒤집어쓸 판이다. ‘인간이 참 제풀에 얼룩덜룩한 것 같다.’ 이러한 법 감정에서 언제나 놓여날 수 있을까. 법원 앞 횡단보도를 ‘신호등 빨간 불빛 따위 아랑곳없이’ 구부정 느리게 걸어가는 ‘저 할머니’처럼 ‘이제, 법이란 법 다 졸업한 무법자’ 쯤 되면 몰라도...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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