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이 먼저다

오철환

객원논설위원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주먹을 쥐고 함성을 지른다. 열한 살 난 어린이가 단상에 올라 구호를 선창하고 어른들이 따라 외치는 모습이 이채롭다. 한 뉴스 채널에서 본 장면이다. 구호 내용이 ‘검찰개혁’과 ‘공수처(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여서 더욱 놀랍다. 초등학생이 검찰개혁과 공수처를 제대로 이해하고 선동하는 것인지 의아스럽다. 하긴 고등학생 인턴이 불과 며칠 만에 의학논문을 후딱 써 치우는 세상이니 열한 살 초등학생이라고 선입견을 가질 일은 아닌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세상물정을 잘 모르고 판단력도 미숙한 어린이를 정치집회 전면에 내세우는 모습은 어른스럽지 않다. 하늘이 내린 천재는 어린 나이에 학술논문을 쓸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인생 경험과 사회적 경륜을 요하는 정치적 판단은 비록 영재라 하더라도 결코 어린이와 친하지 않다. 자아가 성숙될 때까지 보호해주어야 할 어린이를 정치적 도구로 악용하는 행태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고정관념을 갖고 후진 생각을 하는 꼰대의 기우라면 오히려 다행이겠다. 그렇지만 어린이를 당파싸움의 소모품으로 삼아 이벤트나 쇼를 연출하는 행위는 개념 없고 파렴치하다. 유모차를 시위에 끌고 나오는 모습도 안전 차원에서 보아 아름다운 모습은 결코 아니다.

광장민주주의라 하면 고대 그리스 아고라를 떠올린다. 아고라는 정치와 경제 및 철학적인 문제에 대해 토론·숙의하는 소통의 장이었다. 광장민주주의는 다양한 의견을 가진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자유롭게 토론하는 것을 전제한다. 자유 토론을 통해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고 검증한다. 광장정치는 현장에서 소통하고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이다. 불순한 의도로 특정 정파를 광장에 동원하여 편파적 구호를 외치는 것을 토론이나 소통이라 할 수 없다. 광장민주주의의 전제도 충족시키지 못한다. 토론과 소통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만 광장민주주의는 의미를 가진다. 육성으로 들리는 공간범위와 인내 가능한 시간범위로 인한 한계를 감안하여 최대 집회 인원을 추산해보면 광장정치의 범위는 의외로 좁다. 모두 참여할 방법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조건이 되면 가족이나 마을 단위로 대표자를 참석시킬 개연성이 커진다. 참석자는 일종의 비공식적 대의원인 셈이다. 광장민주주의에서 대의민주주의로 넘어가는 현상은 의견수렴이 가능한 방법을 찾아 점진적으로 자연스럽게 진화한 결과다.

대가족을 이루고 살았던 인구 약 25만의 아테네에선 씨족단위로 한명 정도씩 참여하는 민회가 물리적으로 가능했을 수 있다. 인구 5,000만이 넘는 대한민국에서 광장정치를 구현하기엔 용량초과로 무리다. 광장에 지지자들을 불러 모아 대의민주주의의 허점을 보완한다는 말은 헛웃음이 날만큼 어설프다. 편싸움을 하라는 부추김으로 작용할 뿐이다. 국민을 갈라 치는 정치는 마이너스의 정치다. 지금 절실한 건 성향이 다른 사람들을 화합시키는 플러스의 정치다.

시위는 표현의 자유를 실현하는 도구로서 의미가 있다. 이러한 시위는 보통 소외받는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약자들은 의지할 비빌 언덕이 없기 때문에 광장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 반면 권력을 쥔 진영에선 표현의 자유가 그다지 절박하지 않다. 시위하지 않아도 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라인이 다양하다. 이익집단의 실력행사를 제외하고 거국적으로 지지자들을 동원하여 시위할 이유가 거의 없는 환경이다. 그래서 동원된 관제시위는 독재자의 레퍼토리다. 여론을 왜곡하기 위한 방편으로 흔히 이용된다. 최근의 일부 시위가 관제시위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이유다.

관제시위는 시위 구호만 봐도 안다. ‘검찰개혁’, ‘공수처 설치’라는 썰렁한 팻말이 동원된 관제시위임을 웅변하고 있다. ‘검찰개혁’, ‘공수처 설치’라는 이슈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 보낸 정치 슬로건이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민심이 아니다. 먹고사는 문제가 급한데 검찰개혁이나 공수처 설치에 관심이 있을 리 만무하다. 대부분의 국민은 검찰 근처도 가볼 일이 없는 선남선녀인데 검찰개혁에 주먹 쥐고 일어서진 않는다. 거국적 시위를 할 만큼 공수처를 긴박한 사안으로 보지도 않는다. 당장 먹고살 길이 막막한 사람들에게 검찰개혁과 공수처 설치는 배부른 소리다. 뜨거운 관심사는 민생고다. 민생을 외면한 채 엉뚱한 정파적 득실만 쫓는다면 진짜 어려운 상황이 올 수 있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 물이 끓어오르는 비등점이 있듯이 민심이 폭발하는 임계점이 있다. 민생이 최우선이다. 민심을 잘 살펴야 할 때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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