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타리/ 류인서

얼룩말의 검은 무늬와 흰 무늬 사이에서 바람이 생겨난다지/ 피아노의 흰건반과 검은건반 사이에서 풀들이 자란다지// 혓바닥을 쟁기 삼아 말밭을 갈던 연인들이 가시나무를 심는다/ 서로의 귓속에 흉터 속에 심는다// 초원을 벗어난 얼룩말이 가시나무를 버리고 맛있는 가시잎도 버리고/ 내 검은 가로줄무늬 티셔츠의 주름 안으로 뛰어들어온다// 술래와 숨은 이가 자리를 바꾸고/ 심드렁해진 연인들은 다시, 제가 그린 그림의 새장에 갇혀 날개를 퍼덕인다/ (중략)// 가시나무처럼 마디 많은 계절 대신 나는 소심한 얼룩말이나 꺼내 초원으로 돌려줄까 생각 중이다/ 유리컵의 물그림자가 식탁 위에 말갛게 샘을 파는 사이/ 상사병 걸린 바람이 가뿐, 피아노 건반을 딛고 장미 울타리를 뛰어넘는다

- 시집『신호대기』(문학과지성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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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력이 쌓일수록 담백하고 관조적인 어조로 차분하게 굳어져가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식을 줄 모르고 펄펄 끓어오르는 정신을 곧추세워 솟구치게 하는 시인이 있다. 류인서의 시집을 읽은 뒤, 시인에 대한 내 느낌이 후자와 같았다. 더러 환영과 환청으로 감각이 교란당하기도 하고 아포리아에 봉착하기도 했다. 재래식 서정의 틀에서 고이 내려올 것을 강요받으며 문학적 섬망 현상을 겪기도 했지만 자극만은 명백했다. ‘얼룩말의 검은 무늬와 흰 무늬 사이에서 바람이 생겨나’는 현상을 시인은 시집 뒤표지에 이렇게 적어두었다.

얼룩말의 검은 무늬와 흰 무늬가 가진 비밀에 대해들은 적이 있다. 얼룩말을 우아한 얼룩말이도록 하는 줄무늬들이 실은 열대 사바나의 뜨거운 볕을 견디게 해주는 기능적 장치라는 얘기였다. 검은 부분과 흰 부분의 상이한 열 흡수율, 그 온도 차에 의해 발생하는 공기의 흐름―바람이 열을 방사해 체온을 조절해준다는 거였다. 그렇듯 ‘우림과 사막 사이, 얼룩말이 살아가는 경계부의 땅을 생각’하며,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열려 있는 그 제3의 공간, 문학의 공간 역시 그런 곳 아닌가.’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얼룩말의 살갗에 심어진 희고 검은 무늬에 그런 이유가 숨어있다니 새삼 생명의 신비에 놀라며 감탄한다. 그렇다면 얼룩말 줄무늬의 원래 바탕색은 무엇일까. 흰색 바탕에 검은 줄일까, 검은 바탕에 흰줄일까. 검은색 바탕에 흰줄 무늬가 정답이다. 흰 줄무늬를 새겨 넣음으로서 바람이 생기고 그 바람으로 체온이 조절되는 것이다. 세상의 시간은 무심히 흐르는 듯해도 날마다 다른 세기의 파스칼로 바람이 불고 바다에선 파도가 친다. ‘피아노의 흰건반과 검은 건반 사이에서’ 서로 밀고 당기며 풀들이 자란다.

그래서 흑과 백은 그윽한 조화이면서 서로의 울타리일까. 류인서 특유의 상상력으로 빚은 감각언어가 ‘사이’의 틈을 부지런히 메운다.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선택하지 않은 아득한 시간까지. 일상을 집요하게 바라보는 눈이 매섭다. ‘밀도가 다른 두 공기 덩이가 길 가운데서 만나’ ‘전선이 통과하는’ 신호대기의 순간을 그는 허송하지 않고 ‘몸에 시간이라는 전류가 흐르기’까지 자신을 수없이 집적대면서 울타리 앞을 서성인다.

류인서의 시들은 그러한 극기훈련을 통해 피워낸 몽상의 꽃이다. 그 꽃들이 은은하게 때로는 맹렬하게 우리의 마음을 뒤흔든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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