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몇 등급인가요

발행일 2019-10-27 15:10:24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당신은 몇 등급인가요

정명희

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

엷은 햇살이 비치는 나무 계단 사이로 삐죽 나온 페퍼민트 줄기 끝에 동그란 보라색 꽃송이가 피어나 지나는 이의 눈길을 끈다. 마당에서 어린 새순으로 허브 전을 부치던 봄날이 어제 같은데 어느새 계절은 가을로 바뀌어 나날이 깊어가고 있다. 입안에 향 가득한 그 날을 생각하며 앞으로 차가워지는 겨울 훈훈하게 지낼 채비를 해야 하리라.

가을이 되자 짙어가는 단풍만큼이나 축하할 일들이 많다. 날아드는 청첩장으로 일정표에 별 표시가 빼곡하다. 주말이면 몇 개씩 겹쳐 바삐 서둘러야 겨우 눈도장이라도 찍을 수 있다. 그러니 참석해야 하는 경우와 꼭 가지 않더라도 전화로 축하를 대신에 해도 되는 자리, 축의금만 계좌로 보내는 지인 등 나름의 순위를 나누어야 실수를 하지 않을 것 같다.

6촌 동생의 혼사가 있어 몇 달 전부터 여러 차례 연락이 왔다. 우리 가족 대소사에 늘 참석해 주었기에 별 다섯 개를 표시해 두었었다. 결혼식 날, 아침부터 서둘러 식장으로 향했다. 축하객이 얼마나 많았던지 혼주 얼굴을 보는 데만 한참이나 걸렸다. 드디어 시어른이 되는 동생의 손을 잡고 흔들며 축하 인사를 건네니 그가 갑자기 사돈 되는 분께 나를 소개를 한다. 1등급 누님 오셨다면서. 쇠고기도 아닌 사람을 등급으로 높여서 소개하는 그를 보면서 사돈 되는 이도 배꼽이 빠질 듯이 웃어댄다.

결혼식을 마치고 식사를 하고 있으려니 그가 인사차 다시 들렀다. 바쁜 그를 잡고 물어보았다. ‘우리 인생에도 등급이 있느냐.’라고, 그러자 결혼식을 알리는 청첩장을 돌리니 답례로 친구가 보내줘서 받은 것이라면서 기다란 유머를 카톡으로 전달한다. 제목은 수험생 부모가 보면 깜짝 놀랄지도 모르는 ‘등급별 인생’이었다. 맨 처음으로 나오는 것은 남자, 여자였다. ‘남자-남자 1등급: 능력도 있다. 2등급: 인물은 있다. 3등급: 돈은 있다. 4등급: 성질만 있다./여자-여자 1등급: 마음도 곱다. 2등급: 얼굴은 예쁘다. 3등급: 요리는 잘한다. 4등급: 바람만 들었다./백수-백수 1등급: 명함도 있다. 2등급: 할 일도 많다. 3등급: 약속이 있다. 4등급: 시간만 많다./학생-학생 1등급: 친구들과 선생님이 모두 좋아한다. 2등급: 친구들은 좋아한다. 3등급: 매점 아줌마가 좋아한다. 4등급: 오락실, PC방주인만 반긴다. /대통령-대통령 1등급: 국민들이 좋아한다.2등급: 야당에서 좋아한다. 3등급: 여당에선 좋아한다. 4등급: 적국에서 좋아한다./가수-가수1등급: 작·편곡도 잘한다. 2등급: 라이브를 잘한다. 3등급: 표절은 안 한다. 4등급: 염색만 잘한다./자식-자식1등급: 공부도 잘한다. 2등급: 말은 잘 듣는다. 3등급: 몸은 건강하다. 4등급: 자기 아버지를 닮았다.’

그러자 옆에서 열심히 듣고 있던 부산에서 온 6촌 오빠가 이야기 자락을 꺼낸다. 어느 40대 아주머니가 시장에 물건을 사러 갔다. 젊은 남자 점원이 반갑게 맞이하며 말했다. ‘어서 오세요~! 아주머니, 정말 젊고 멋있어 보여요.’ 기분이 좋아진 아주머니가 점원에게 말했다. ‘어머, 그래요? 내가 몇 살 같아요?’ 점원이 말했다. ‘30대 초반 같으세요.’ 아주머니가어머, 그렇게 봐주니 정말 고마워요. 반색하며 답하자 남자 점원이 말했다. ‘뭘요. 저희 가게에선 뭐든지 30% 할인해 드리잖아요.’ 웃음기 없이 이야기하는 얼굴을 보면서 듣는 이들은 모두 박장대소를 하였다.

6촌은 일찍 부모를 여의었지만 잘 자라 성공하였다. 사람들과 일을 함께 하다 보면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해야 할 일도 못 하는 사람, 딱 주어진 일만 하는 사람, 요구받은 일 이상을 하는 사람으로. 누구와 일하고 싶은가. 맡겨진 일 이상을 해내는 사람과 함께 일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사람은 자연스레 성공도 따라올 것이다. 집안 큰일에는 늘 그가 앞장서 주었다. 아버지 장례에 따라가 상여를 매고 산을 오른 이도 바로 그였으니 어찌 경사스러운 날에 참석하지 않겠는가. 그는 늘 기분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한결같다. 늘 마음을 열어 포용하고 남을 의심하지 않는다. 열린 마음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 혁신하고 상황을 꼼꼼히 점검해 실패를 줄이지 않던가. 성공 가능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으니, 우리 인생에 등급을 매긴다면 그가 바로 1등급 인생일 것이다.

힘들고 스트레스 받는 일이 많더라도 함께 자랄 때의 모습 되새겨 옛날을 회상할 수 있는 그런 경사스러운 자리가 많으면 하는 바람이다. 모임 원칙은 빠삐따(빠지지 말고 삐치지 말고 따지지 말고)로 참석하는 이가 1등급이라면 나의 등급은 몇 등급일까? 생각해보는 10월이 저물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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