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선 김규인

참닥나무 가로수 길을 지나 공방으로 들어가며 하늘을 쳐다본다. 청송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옅게 드리운다. 하얀 구름과 흰색 한지 그리고 무엇을 보게 될까. 궁금증을 앞세워 공방 앞에 닿는다. 몸은 가칫하지만 눈빛이 까만 무형문화재 이자성 한지장이 나를 맞는다.

장인이 차 한 잔 내놓으며 자신의 이력을 들려준다. 자부심 서린 어투 간간이 회한이 묻어난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한지 만드는 일을 시작한 장인은 고된 일이 싫어 탄광과 농사일, 타이어 회사에 근무하다가 아버지의 부름에 다시 한지를 만들었다. 신라에서 시작한 한지의 질긴 유전인자가 장인의 몸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장인은 수천 가지의 흰색 중에서 신라 천 년의 흰색을 만든다. 참닥나무의 갈색 껍질이 흰색의 한지가 되기까지 장인은 손을 허투루 놀리지 않는다. 한눈을 팔면 점이 찍히기에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한다. 손길과 눈길이 수백 번 더해져야 온전한 백지(白紙)를 얻는다. 흰색을 만드는 것은 잡다한 색깔이 들어간 세상에서 때 묻은 마음을 털어내는 일이다.

한지, 그 시작은 물이다. 지하 260m 바위틈에서 철분과 석회 성분이 없는 물을 길어 올린다. 다음은 섬유질이 부드러운 일년생 참닥나무다. 미생물에 의한 변색을 막고자 한겨울 청송 골짜기 찬바람이 더해진다. 장인의 한지는 기계의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맑고 푸른 청송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하루하루가 고단한 몸짓이다. 찐 참닥나무의 밑동을 잡고 벗긴 잿빛 껍질을 찬물에 불린 후 닥칼로 겉껍질을 벗겨내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닥칼로 잿물에도 녹지 않는 흑피와 청피를 긁어내고 잡티를 골라낸다. 장인은 하얗게 변하는 닥섬유만 쳐다볼 뿐 들어간 손길의 수는 헤아리지 않는다. 백닥을 다듬는 손이 점점 검어져도 하얀빛을 찾아가는 기쁨은 하루하루 쌓인다.

검은 잿물에도 백닥은 검어지지 않는다. 콩대의 타고난 강한 알칼리성의 잿물은 불순한 색을 빼낸다. 남은 잿물을 흐르는 물로 씻어내면 섬유의 광택이 은은하다. 그래도 장인은 만족하지 못한다. 수천 가지가 넘는 흰색 중에 참된 한지의 흰색을 찾는다. 골고루 빛을 받도록 백닥을 뒤집어서 당분, 회분, 기름을 날려 햇빛이 준 흰색을 얻는다. 자연의 화학과 물리를 넘어 흰색에 다가서는 장인의 의지는 끈질기다.

닥돌 위에 백닥을 올려놓고 방망이로 두들겨 풀어낸다. 황촉규 뿌리의 점액질을 넣어 막대로 저으며 가는 실 한 올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본다. 막대에 부딪히는 촉감으로 닥풀의 양과 한지의 두께를 가늠하고 외발을 들고 한바탕 춤판을 벌인다. 줄 하나에 의지해 앞뒤 좌우로 지물을 흘리며 몸으로 우물 정(井)자를 그린다. 합판같이 질기고 견고하게 짜인 하얀 한지를 꿈꾼다.

한지에도 더하고 빼는 법칙이 들어있다. 화학과 물리를 앞세워 눈에 보이지 않는 얼룩의 원인을 없애고 마지막으로 물을 빼낸다. 찌고, 긁고, 골라내고, 삶고, 두들기고, 뜨고, 빼고, 말리고, 다듬는 과정은 모두 빼기이다. 빼기만 한 것 같지만 더하는 것도 있다. 물과 햇빛과 바람 그리고 장인의 땀과 정성에 간절한 기다림이다.

한지를 만들 때 물은 어느 공정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물은 시작부터 끝까지 흰색 한지를 만들기만 할 뿐 자신을 위하여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지만 한지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장인의 모습과 닮았다.

백 번의 손길을 거친 한지는 장인의 마음을 닮은 순수한 흰색이다. 하얗다와 희다, 외면과 내면을 보고 모든 빛을 반사하는 무채색. 그래서 모든 색을 품을 수 있다. 장인은 하얀 한지를 백 장씩 포개어 보관한다. 백 번의 손길이 들어간 백색의 한지를 백 장씩 포개면서 장인은 숱한 노고를 위로받는다.

백지는 빛깔이 희고 고와서 흰 백(白)자를 쓴다. 장인은 일백 백(百)자에서 일(一)을 빼서 얇은 한지를 만드는 데 몸과 마음을 다한다. 간절한 기도를 담아서 만들기에 한지를 태우면 색깔만 검을 뿐 고운 결은 그대로 남는다. 태워서 남은 한지의 검은 결은 불도 산화시키지 못하는데, 그것이 바로 명장의 자존심이다.

한지를 만드는 일은 지난하다. 베고, 찌고, 쬐고, 지겹도록 피닥을 긁고 어깨가 빠지도록 백닥을 두들겨야 한다. 그뿐인가, 추운 겨울에 물질하고 뜨거운 여름에도 불을 때야 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들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격하고 고단한 여정이 장인의 길인 것을···.

장인의 노력을 활자로 치면 책 한 권 분량을 채우고도 남는다. 한지는 자신의 작품이지만 낙관도 찍을 수 없다. 바늘구멍만 한 점조차 찍을 수 없다. 사람의 일상에 요긴하게 쓰이지만, 그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없다.

한지는 장인의 노고를 몸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하얀 백지로 사람이 하지 못한 말을 한다.

장인은 단지 백지로만 말한다.







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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