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유소/ 윤성택

단풍나무 그늘이 소인처럼 찍힌 주유소가 있다 기다림의 끝/ 새끼손가락 걸듯 주유기가 투입구에 걸린다/ 행간에 서서히 차오르는 숫자들/ 어느 먼 곳까지 나를 약속해줄까/ 주유원이 건네준 볼펜과 계산서를 받으며/ 연애편지를 떠올리는 것은/ 서명이 아름다웠던 시절/ 끝내 부치지 못했던 편지 때문만은 아니다/ 함부로 불질렀던 청춘은/ 라이터 없이도 불안했거나 불온했으므로/ 돌이켜보면 사랑도 휘발성이었던 것/ 그래서 오색의 만국기가 펄럭이는 이곳은/ 먼 길을 떠나야하는/ 항공우편봉투 네 귀퉁이처럼 쓸쓸하다/ 초행길을 가다가 주유소가 나타나기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여전히/ 그리운 것들은 모든 우회로에 있다

- 시집 『리트머스』 (문학동네,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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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멈춰선 주유소에서 옛 연애를 떠올리는 감수성의 탁월함이라니 놀라워라. 요즘은 그런 일이 잘 없던데 전에는 기름을 넣을 때도 꼬박꼬박 서명을 했었다. ‘주유원이 건네준 볼펜과 계산서를 받으며 연애편지를 떠올리는 것은’ 머릿속이 온통 연애로 가득 차있는 사람 같다. 마치 연애지상주의자의 순발력 같다. ‘서명이 아름다웠던 시절’ 아닌 게 아니라 아름다운 서명 하나 간직하려고 얼마나 아까운 공책들의 뒷장들을 낭비했던가. 그때는 지금처럼 카드계산서에 쓰라린 서명으로만 기능하게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휘발성의 삶, 훨훨 타오를 것 같았던 사랑, ‘함부로 불 질렀던 청춘’이 그 서명의 언약으로 수렴되기를 간절히 원했으나, ‘끝내 부치지 못했던 편지’가 되고만 것이다. ‘라이터 없이도’ 충분히 불온했으므로 여지없이 폭발할 수 있었던 그 사랑도 그렇게 불발인 채 시간이 흐르면 귀 닳은 편지봉투처럼 시금털털해지기 마련. 돌이켜보나마나 모든 사랑은 ‘휘발성이었던 것’ ‘그래서 오색의 만국기가 펄럭이는 이곳은’ 실종된 ‘항공우편봉투 네 귀퉁이처럼 쓸쓸하다.’ 뜨거운 열정도 휘발하고 나면 남는 것은 ‘단풍나무 그늘’같은 추억뿐.

혹은 약간의 수면장애나 가슴통증으로 남겨지리란 것. ‘기다림의 끝’에서 빵빵하게 채워진 연료는 지금이라도 다시 나를 먼 곳까지 데려다줄 수 있을까. 내 사랑의 피가 흐르고 내 사랑이 숨 쉬는 곳이 과연 존재하기나 할까. 이미 ‘유효기간 지난 플래카드처럼 매여 있는 것이 얼마나 치욕이냐고’ 묻고 있는 건 아닐까. ‘초행길을 가다가 주유소가 나타나기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고? 아니다. 아니었다. 난 모른다. 그리운 것들의 우회로를 돌아 보일 듯 잡힐 듯 신기루 같은 사랑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나는 단 한 번도 누구에게 길을 물어본 적이 없었다.

하늘의 별을 향해 걸어가는 것과 같았으나 결코 걸어서 하늘에 다다를 수 없음을 알았다. 여행길에 나설 때는 출발하기 전에 무얼 챙겨갈지를 생각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온몸으로 밀고 나아가려면 남다른 용기가 필요했다. 눈에 보이는 곧은 길만이 아니라 샛길도 미리미리 살폈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두려웠으므로 믿지 못했다. 사실 믿음의 반대는 의심이 아니라 확실성이었다. 지금에야 ‘그리운 것들은 모든 우회로에 있다’는 것을 안다. 이제 와서 기진한 내 사랑을 충전해줄 곳은 아무데도 없다. 취약하고 불완전한 나를 스스로 얼싸안고 보듬을 밖에.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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