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속/ 황수아

나는 탄타로스의 굶주림을 닮은 곳으로 접속할 것이다. 아편굴처럼 흰 접속의 동굴에서 내 눈이 지워질 때까지 연기를 피워 올릴 것이다. 필생의 익명을 얻고 싶다. (중략) 오래 전 잃어버린 몽상을 미행하는 일도 너와 스쳐갔던 일순의 일순간을 주소 창에 찍는 일도 없을 것이다. 줄곧 자라나던 내 속눈썹이 데시벨을 휘감을 때쯤 찬바람은 경쾌한 바이러스를 몰고 올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붉은 무덤을 닮은 메신저 안에서 서서히 독살될 것이다. 그 순간 낯선 행성의 언어로 유언할지 모른다. 패스워드가 사라지고 로그아웃을 할 수 없는 자멸의 접속을 바라던 삶이었다고.

― 시집 『뢴트겐행 열차』 (시인수첩,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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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아의 시는 ‘심미적 감각을 살려 재생하고 배열하는 언어적 힘’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대뜸 ‘나는 탄타로스의 굶주림을 닮은 곳으로 접속할 것이다’라고 시작되는 이 시는 얼마간의 난독을 예고하고 있으며, 시단의 꽤 안정적인 시류의 형태로 자리 잡은 좀 ‘있어’보이게 하려는 장치 같은 것도 엿보인다. 희랍신화에 나오는 탄타로스는 시지포스와 함께 지옥에서 고생하는 인물이다. 흔히 손에 닿지 않는 젊은이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와 갈등을 탄타로스의 갈증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그 영원한 목마름은 형벌 치고도 아주 엿 같은 형벌이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고 고개를 숙이면 연못 물은 어느새 바닥을 드러내고, 배가 고파 과일을 따 먹으려고 손을 뻗으면 산들바람이 불어와 나뭇가지는 저만큼 들려 올라간다. 탄타로스는 영원한 목마름과 굶주림 속에서 고통 받는다. 이 시에서 ‘탄타로스’는 무슨 인터넷게임의 주인공 같기도 하고, 게임에 푹 빠져 중독된 시적 화자를 지칭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아편굴처럼 흰 접속의 동굴에서 내 눈이 지워질 때까지 연기를 피워 올리는’ 행위는 영락없이 인터넷 게임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폐인’의 모습 그대로다.

인터넷 게임의 가학성과 폭력성은 가상공간 안에서만 머물지 않고 은행과 방송사의 전산망 해킹사건 등에서 보듯이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사회시스템을 만신창이로 만들 수도 있다. 2011년 농협전산망 해킹은 파일공유사이트에서 영화를 내려 받다가 악성코드에 감염된 것인데 개인의 경우도 바이러스 감염 사례는 흔한 일이다. 1997년 당시 통신시대의 화제를 불러일으킨 영화 ‘접속’을 리뷰했다. 온라인에서는 ‘절친’인 두 사람이 정작 실제로 마주쳤을 때는 영 모르는 사람으로 스쳐 지나치는 장면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있는 영화다.

무한한 정보와 자극, 그리고 시공을 초월한 통신망에 촘촘히 연결 접속된 상태에서 ‘필생의 익명’으로 살아가는 건 과연 해피하기만 할까. 인터넷은 우리의 삶을 발전시키고 풍요롭게 하는데 긍정적이고 혁신적인 역할을 담당해왔고 장차에도 그러겠으나 순기능으로만 작동하지는 않는다. ‘나는 접속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지만 어질어질한 정보통신의 발전 속도에서 불길한 역기능의 예감도 동시에 어른거리니 그게 문제다. ‘탄타로스’처럼 욕구와 가능성의 상극에서 허우적대며 ‘자멸’하고 ‘서서히 독살’되는 건 아닐까 불안한 구석도 없지 않다.

‘오래 전 잃어버린 몽상을 미행하는 일도 너와 스쳐갔던 일순의 일순간을 주소 창에 찍는 일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건만, 의도하지 않아도 검색창에 이름을 넣을 때도 있는 것이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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