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수필대전 ‘칠불암에 달이 뜨면’

발행일 2019-11-04 20:00: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입선 김태선

비구름이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더니 솔밭 위로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졌다. 발걸음을 재촉했어도 꼬리가 잡혀 나는 흠뻑 젖은 채 남산 자락을 걸었다. 저 구름이 몸을 풀어 후련하게 비를 다 쏟아버려야 하늘이 다시 밝아지리라.

칠불암 가는 길은 언제나 가슴 설렌다. 어릴 적 어머니를 따라다닐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길게 이어진 오솔길 옆으로 흐르는 시냇물도 여전하다. 물길은 끊어지다 이어지고 이어지다 끊어져서 한참은 물소리만 따라온다. 그 물길 끝에 옹달샘이 나온다. 샘물로 목을 축이고 대나무 숲 터널을 지나 아늑한 돌축담에 올라선다. 거기서 마침내 부처님을 뵙는다. 바위에 새겨진 일곱 부처님이 저 아래 서라벌 들판과 토함산, 동해를 굽어본다.

나는 마애불상이 새겨진 바위가 처음부터 그리 낯설지 않았다. 그곳에 가면 외갓집 뒤꼍에 있던 큰 바위가 생각났다. 외갓집의 바위는 원래 하나였는데 오래전 벼락에 갈라져 세 개가 되었다고 한다. 갈라진 그 바위들 모양이 멀리서 보면 농부가 김을 매는 것 같기도, 엎드려 절하는 것 같기도 했다. 동네 사람들은 외할머니와 두 딸, 세 모녀가 오순도순 사는 모습이 흡사 바위를 닮았다며 외갓집을 세바우집이라 불렀다.

방학이면 우리는 외갓집으로 몰려갔다. 마당을 가로질러 흐르는 개울물과 뒤꼍의 바위는 색다른 풍경이었고 한두 살 터울의 이종사촌들은 좋은 친구였다. 외할머니는 위험하다며 바위 근처에 얼씬 못하게 했지만, 호기심 많은 우리에게는 더없는 놀이터였다. 놀다가 다치기도 했다. 내가 바위에 이마를 긁히고, 오빠가 바위에서 미끄러져 팔이 찢겼다. 그러다 큰일이 터졌다. 어느 날 같이 놀던 이종사촌 여동생이 바위에서 떨어졌다. 동생은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

이모는 고명딸을 앗아간 바위를 미워했다.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방황하다 다 소용없다며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외할머니가 소중히 여기던 신줏단지까지 내다 버렸다. 외할머니는 아무 말도 못했고, 차라리 바위를 파내고 싶다 했다. 그 후 외갓집에는 아이들 뛰노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어느 초겨울, 외할머니가 바위에 켜둔 촛불이 바람에 넘어져 뒷산에 불이 났다. 불은 집까지 태웠다. 혼자 있던 외할머니는 혼비백산했고 그 후유증으로 정신줄을 놓았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이모는 친정과 왕래를 끊었고 소식조차 전하지 않았다. 몇 년 후 어머니마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치료 후에도 말이 어둔하고 기억이 온전치 못했다. 치매 초기였다. 그 소식을 듣고 이모가 한걸음에 달려왔다. 이모는 내가 언니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며 멍하니 앉은 어머니를 부둥켜안았다. 이렇게 오면 만날 걸, 왜 그토록 오랜 세월 골을 파고 살았는지 모르겠다며 울먹였다. 무슨 소리를 해도 별 반응이 없던 어머니가 칠불암이란 말에 눈을 반짝였다. 그곳에 가고 싶냐고 묻는 이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이모와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칠불암에 올랐다. 나는 칠불 앞에 서서 어머니를 위해 빌고 또 빌었다. 바위를 향해 앉은 이모의 눈빛도 간절했다. 그때처럼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순간이 있었을까. 그런 우리 옆에서 어머니도 무엇인가를 빌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어머니는 과거의 기억 속으로 돌아가 내 결혼과 동생들 학업성취를 기원하고 있었다.

옛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날이 개고 하늘에 달이 떴다. 빗물에 씻긴 달빛은 유난히 밝고 산 기운에 씻긴 내 마음도 퍽이나 가벼웠다. 내 마음이 가벼우니 그날따라 아미타여래불이 빙그레 웃으셨다. 삼라만상이 잠든 고요한 밤 부처님 미소 속에 어머니가 떠올랐다. 어머니도 젊어서부터 칠불암을 좋아했다. 당신도 나처럼 이곳에 와서 근심을 내려놓았을까.

나는 한때 칠불암에 매달렸다. 집안일이며 직장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 답답할 때마다 칠불암을 찾았다. 사방불을 돌며 절하다 보면 어둠이 물러가고 동이 텄다. 안개가 걷히면서 눈부신 새날이 펼쳐지고 헝클어진 실타래 같던 생각이 하나둘 가닥이 잡혔다. 뿌듯했다. 아, 어머니는 부처님께 소원만 빌러 다닌 게 아니었구나.

칠불암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또 있다. 그는 암자에 오를 때마다 옹달샘을 쳐내고 있었다. 한 방울 물도 남기지 않으려는 듯 샘 바닥이 드러나도록 바가지 든 손을 부지런히 놀렸다. 암자에 있는 사람이려니 했는데 나처럼 가끔 칠불암을 찾는다고 했다.

“물이 말갛게 보여도 자주 청소를 해야 합니다. 하나둘 떨어져 내린 돌 부스러기도 쌓이면 물을 흐리게 합니다.”

번뇌에 가득 찬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말 같았다.

칠불암에서 내처 신선암에 오를 수 있다. 칠불암에서 올려다보면 저 위로 툭 튀어나온 큰 바위가 눈에 들어오는데 바로 신선암이다. 마음이 가벼우면 몸도 가벼워지는 법, 신선암까지 오른다. 돌계단을 딛고 한 걸음 한 걸음 점을 찍듯 오른다. 숨이 차오를 즈음 이번에는 좁디좁은 난간 길, 바위를 안고 가재걸음을 걸어야 한다. 이마와 손에 닿는 차가운 바위의 감촉을 생명줄처럼 힘껏 껴안는다. 발밑을 내려다보니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아찔하다. 늘 깨어있으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리라.

칠불암을 등지고 휘적휘적 내려오는데 지게를 진 남자가 후딱 내 옆을 지나쳤다. 암자에 짐을 날라다 주는 듯했다. 맨발이었다. 저이는 발도 아프지 않을까? 힘이 들 텐데 어쩌면 저렇게 편안한 얼굴일까. 나는 얻으러 가는 마음이었으니 다리가 무거웠는가. 스스로의 물음에 멈칫하는데 칠불암 은은한 달빛이 내 등을 토닥였다.

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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