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리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권순진

현리 황톳길 시간에 한 대씩 오는 버스를 기다렸다. 작은 평상이 놓인 주막에서 막걸리 한 사발을 시켰다. 몸빼바지에 허리 굽은 할멈 비녀 매무새 하나는 단정했다. 어느 도망자와 어느 추격자가, 때려치운 농사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회로 내빼는 한 이농인이, 귀향하는 한 시무룩한 도시 파산자가 번갈아 입술의 침을 묻혔을 양은 잔에 가득 찰랑이는 막걸리. 술잔보다 더 큰 그릇에 수북이 담긴 정구지 김치가 안주 자격으로 나왔다// (중략)// 지나친 공기노출로 깊고 풍부한 맛이라 둘러대긴 힘들지만 고향의 흙내음 하나는 온전했다. 일회 일획의 정구지로 막걸리 잔을 다 비웠다. 멀리 버스의 기척이 들렸다. 서둘러 셈을 치르고 버스에 올라타자 부릉~ 불량한 가스를 내뿜으며 바퀴가 땅을 크게 핥았다. 황토 먼지가 내 앉았던 자리를 공평하게 도포했다. 버스의 뒤창을 통해본 할머니는 내가 쓴 젓가락으로 사발에 담긴 정구지 뭉텅이를 획 한판 크게 뒤집었다. 굽은 할머니의 등이 밉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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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서울의 봄’ 그해 가을이었으니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때만 해도 난 현리가 강원도에 속해있는지 경기도 소재인지 몰랐다. 하여간 그 어디 기도원에 틀어박혀 몇 달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친구 L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지금은 그 친구의 이름도 정확히 기억해내지 못한다. 학교 동창도 고향 친구도 직장 동료도 아니었다. 희뿌연 최루가스가 남대문의 내가 일하는 사무실까지 스멀스멀 흘러들었고 우당탕탕 쫒기고 있는 한 젊은이가 사무실로 느닷없이 난입해 들어왔던 것이다.

직원들이 그를 간신히 숨겨주었고 그날 젊은 직원 몇과 어울려 북창동에서 술을 마셨다. 그날 이후 사흘도리로 나를 찾아왔고 그때마다 술을 퍼마시고 떠들어댔다. 그는 나보다 두 살 아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로 그의 말을 듣는 쪽이었고 간간히 고개를 끄덕였을 뿐 나는 당시 비겁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다만 당시 내가 다니던 직장에는 노조가 없었고 불허하였으므로 몇몇 직장 선배가 추진하는 노조 설립 운동에 미약한 힘을 보태고 있었다. 그때 L은 전태일 열사를 언급했고 나를 정신적으로 북돋우어주었다.

그러나 나의 습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수입이 생기는 족족 소비하기에 바빴고 소비의 주요항목은 술이었으며 가끔 을지로나 종로의 조명이 볼그족족한 주점에도 드나들곤 했다. L과 함께 이차로 딱 한번 간 적이 있다. 조명 아래서 그의 표정이 나를 압도했다. 그러고서 몇 달 만나지 못했는데 현리의 한 기도원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그의 표정은 생각보다 밝았다. 그 기도원에 연줄이 있어서 좀 쉬고 싶어서 왔다고 했다. 그와의 만남은 그게 다였다. 그리고 이 ‘시’는 L과는 아무런 감정의 연결고리가 없으며 맥락도 없다.

이번 춘천여행에서 돌아오는 길 그를 잠시 떠올렸고 자연히 이 ‘시’가 생각났다. 찰찰 넘치는 막걸리 한잔이 내가 마신 어떤 술보다도 맛났다. 나는 나중에야 막걸리 한 잔과 정구지 한 올이 그토록 구수했던 이유를 알았다. 사람이든 사랑이든, 술이든 안주든 내게 가장 필요한 시기의 현안이었을 때, 그것에 집중함으로써 그 진가와 진면목이 발현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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