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은 양질의 일자리다

박운석

패밀리푸드협동조합 이사장

일과 삶의 균형, 일과 가정의 양립, 퇴근 후 쉼표 있는 삶, 저녁이 있는 삶….

이들 모두 지난해 이후 직장인들 사이에서 가장 공감을 얻었던 신조어들이다. 특히 2018년 3월 ‘주 52시간제’ 도입을 중심으로 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여야 합의로 통과된 이후 ‘워라벨(work and life balance·일과 생활의 균형)’이 중심 이슈로 부상했다. 이 용어들은 이제 전혀 낯설지 않은 사회적 화두가 된 셈이다.

내년부터는 이런 현상이 더욱 강화될 듯하다. 내년 1월1일부터 종업원 50인 이상~300인 미만 사업장도 ‘주 52시간 근무제’ 적용을 받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주 52시간 근무제는 지난해 7월 300인 이상 사업장부터 진행됐다. 앞으로 50여 일 남짓 남은 새해부터는 50인 이상 사업장에도 적용된다. 만약 주 52시간을 넘겨 일하는 노동자가 회사를 고용노동부에 신고하면 ‘2년 이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 벌금’이라는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 내년부터는 중소업체까지 노동시간 단축 정책의 타깃이 된다는 말이다.

그동안 저녁이 있는 삶, 휴식이 있는 삶을 실현하기 위한 법 제도 개선에 나선 정부로서는 일정부분 성과도 있었다. 무엇보다 과로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게 크다. 고용노동부 사업체노동력조사에 따르면 2018년 한국 노동자 1명(국내 5인이상 사업체 소속)의 연간 노동시간은 1986시간이었다. 이는 2017년 연간노동시간 2014시간에 비해 1.4%(28시간) 줄어든 것이다. 정시 퇴근하는 ‘칼퇴’문화가 정착하면서 직장 내 회식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실제 삶에서는 워라벨을 즐기는 것이 쉽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OECD가 조사한 ‘워라벨 지수’를 보더라도 10점 만점에 한국은 4.7점으로 35개 회원국 중 32위다.

워라벨을 잘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는 경제적인 부담 때문이다. 최저임금 급등과 주휴수당 문제로 기업들이 정규직 직원 채용을 꺼리게 됐다. 8시간 풀타임 근로자 대신 일하는 시간에 딱 맞춰 일할 사람을 찾다보니 결국은 시간제 근로를 찾아다니는 토막근로자들만 많아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들 토막근로자들은 이곳저곳 옮겨다니며 일을 하는 메뚜기족 신세를 면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특히 자영업자들의 경우 아르바이트 고용까지 줄이며 본인이 직접 일자리로 뛰어들었다. 그러다보니 ‘알바 구인’ 자체를 대폭 줄이면서 버티고 있는 실정이다. 아르바이트를 구하더라도 근무시간 쪼개기로 ‘메뚜기족 알바’만 늘어나게 된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통계자료로도 드러난다. 전체 임금근로자 중 비정규직이 차지하는 비중은 36.4%인 것으로 나타났다. 10월말 통계청이 발표한 ‘2019년 8월 경제활동인구 고용 형태별 부가조사 결과’에 나온 수치다. 올해 8월 기준 비정규직 근로자는 748만1000명으로 불과 1년 전보다 86만7000명 증가했다. 통계청 해명대로 조사항목 변경 때문에 35만~50만명이 비정규직으로 편입됐다고 보더라도 증가 폭이 너무 크다. 2010년 이후 지난해까지는 연간 비정규직 증가 규모는 1만~3만명 수준이었다.

이렇다보니 메뚜기족 젊은이들은 워라벨을 ‘머라벨’(Money and Life Balance)이라는 신조어로 표현한다. 주 52시간 도입과 일자리 쪼개기 영향으로 시간은 남는데 오히려 소득은 줄어 ‘저녁만 있는 삶(돈은 없으면서)’이 되었다고 자조하고 있다.

부산여성가족개발원이 최근 부산지역 직장인 800명을 대상으로 실태조사한 결과를 보면 27.9%만이 자기 스스로 워라벨을 잘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개인과 기업의 생산성과 삶의 질 향상에 워라벨이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는 70% 이상이 동의하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너무 낮은 수치다. 워라벨이 어려운 이유는 경제적 부담(39.3%)과 장시간 근로에 따른 시간부족(35.9%)이 가장 큰 이유였다.

결국 퇴근 후 쉼표 있는, 저녁이 있는 삶의 실천이 어려운 건 좋은 일자리 부족 때문이다. 양질의 일자리는 재정지출 위주의 고령층 일자리와 단기 계약직을 늘리는 것으로 절대 해결할 수 없다. 제조업과 서비스업 등 전체 산업의 경기가 활성화되어야만 가능하다. 정부가 나서서 민간경제를 활성화 시키는 환경부터 만들어가야 하는 이유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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