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산 마애여래입상…하늘로 뻗은 험지 가까스로 오르니 고난 다 이겼다 내미는 자비로운 손

발행일 2019-11-06 09:39:2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20·끝> 금오산 마애여래입상



거대한 암벽 속에서 튀어나오는 것처럼 보이는 보물 제490호 금오산 마애여래입상. 중생들의 소원을 모두 성취하게 해 준다는 여원인의 자세를 취하며 손을 길게 내리고 있다.


박순국 언론인
정상에 이르는 길은 된비알의 연속이다. 몹시 험한 비탈길이라는 의미의 된비알 곳곳에는 거대한 암석이 솟아 있다. 금오산 기암괴석 곳곳에도 단풍이 물들었다.

박물관 안에 있는 유물이 아니라 원래의 자연 속에서 마주할 수 있는 문화재를 만나러 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

채미정∼케이블카∼해운사∼대혜폭포∼오형돌탑∼마애보살입상∼약사암으로 길을 잡았다.

대혜폭포 입구에서부터 본격적인 산행은 시작된다. 정상을 밟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할딱고개의 시작이다.

숨이 가빠 헐떡거릴 정도로 가파르다 하여 할딱고개 또는 깔딱 고개란다. 하늘로 향한 계단이 떡 하니 버티고 서 있고 그 길 끝나면 험준한 산길이다.

그곳에서도 2㎞가 넘는 길을 오르내려야만 목적지에 닿는다. 힘들게 올라왔으니 심장이 쿵쾅거린다.

보물 제490호 구미 금오산 마애여래입상은 암벽 밖으로 튀어나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석공은 산꼭대기에 붙어 있는 거대한 암벽 속에 원래 있던 부처를 밖으로 현신해 내었다.

그 앞에 잠시 합장하고 섰다.

마애불은 절벽 중간에 나투었으니 저절로 우러러보게 돼 가슴이 뛰고 경외심을 느끼게 한다. 시간을 돌에 새긴 그림, ‘마애불’ 속에 그 천 년의 시간이 묻혀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 앞에 서면 옷깃이 여며진다.

암벽의 모서리 부분을 중심으로 양쪽에 조각된 특이한 구도를 보여주는 마애여래입상. 상체부분의 불상 옆 모습을 보면 그 특징을 확실히 알 수 있다.
◆10세기경 고려 불상

금오산 마애여래불은 상호와 신체 등 각 부분의 양식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말의 형식을 계승한 10세기경 고려시대에 제작된 불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암벽의 모서리 부분을 중심으로 양쪽에 조각된 특이한 구도를 보여준다. 아직 비슷한 예가 없으므로 고려 초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보고 있다.

전체 높이는 5.5m, 불상 높이는 4.2m이다. 1968년 12월19일 보물로 지정됐다.

어깨나 팔의 부드러운 굴곡은 얼굴에 어울리는 형태미를 묘사하고 있어서 상당한 수준의 조각가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문화재청의 설명에 의하면 옷자락을 잡고 있는 오른손이나 지나치게 큰 왼손, 둔중하게 묘사된 두 발, 경직된 옷 주름 문양 등에서 신라시대보다 둔화되고 위축된 고려시대 조각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불상이 딛고 서 있는 반원형의 연꽃 대좌와 부처의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에서도 나타난다. 즉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의 광배인데 이 말은 부처나 보살의 온몸에서 나오는 빛이 배의 모양이라는 뜻이다.

머리 부분 광배의 윤곽은 3중의 선으로 표현됐다. 머리 부분에서 이어져 내린 2중의 선으로 다시 신체부분의 빛을 표현했다.

전체 광배의 내부에는 불꽃 문양을 새기지 않았다. 머리 위에는 크고 높은 육계가 표현되어 있고 3면 보관이 있으나 조각장식은 마멸로 분명하지 않다.

마애불이 서있는 부근에서는 구미 공단, 금오지와 시가지가 내려다보인다. 가을 들판을 남쪽으로 휘돌아나가는 낙동강 구비도 보인다.
얼굴은 비교적 원만하고 약간의 부피감도 있지만 긴 눈은 가늘게 뜨고 있고, 초승달 모양의 눈썹은 작고 오뚝한 콧잔등으로 이어져 있다.

예리한 눈과 작은 입에서 신라시대의 마애여래입상과는 다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코밑에는 길게 표현된 인중과 함께 입술을 가늘게 조각해 다소 경직되고 근엄한 인상을 풍긴다.

귀는 어깨에 닿을 듯하며 목의 삼도(三道)는 명확하지만 가슴까지 내려오는 형태이다.

천의(天衣)는 왼쪽 어깨에서 가슴 아래로 내려져 있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어 여래상에서 나타나는 우견편단(右肩偏袒)과 비슷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선각으로 표현된 옷 주름은 어깨에서 한 번 접혀진 다음 왼팔과 허리를 감싸며 흘러내리고 있다. 하반신에서는 반원형의 옷 주름도 부드럽게 표현돼 있다.

가슴과 배, 팔 등 신체 각 부분이 두드러져 보이며 발은 다소 묵직하고 큼직하게 조각됐다.

이 마애여래불은 장대한 신체에 전체적으로 윤곽은 뚜렷하지만 세부적인 신체의 굴곡은 생략돼 있다. 오른발에 무게중심이 옮겨지도록 허리를 오른쪽으로 살짝 튼 유연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어깨의 선은 매우 원만하고 자세도 좋지만 가슴·팔·하체 등은 둔탁하게 처리했다.

오른손은 아래로 내려뜨려 천의 자락을 잡고 있다. 왼손은 팔꿈치를 약간 구부려 상체에 붙여 손바닥을 바깥으로 향하고 있다.

대좌는 불상을 중심으로 반원형이 되게 부각돼 있다. 중생들의 소원을 모두 성취하게 해 준다는 여원인(與願印)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는 불교에서 여래나 보살이 취하는 수인(手印)의 하나이다. 부처가 중생에게 사랑을 베풀고 중생이 원하는 바를 달성하게 해준다는 덕을 표시하는 자세이다.

삼국시대의 불상에서는 시무외인과 함께 불상의 종류에 관계없이 모두 취하고 있는 형태이며, 그래서 이 두 수인을 통인(通印)이라고도 한다.

저 산 아래, 우리 인간을 향해 손바닥을 펴보인 것이다. 천수천안은 아니라도 부처의 큰 능력을 상징하듯 왼손을 더욱 길게 표현한 것으로 느껴진다.

‘두려워 말라. 우환과 고난은 이미 지나갔다.’ 펼친 부처의 긴 손으로 더 많은 중생의 시름을 다 받아 주겠다는 자세로 보인다.

그 뜻을 헤아리듯 자연암벽에 매달려 마애불을 새긴 석공의 마음이 예사롭지 않다.

거대한 암벽 끝에 불어 있는 제비집처럼 작은 절인 약사암은 김천 직지사의 말사이다.
암벽 밖으로 나툰 마애불은 자연 속의 기운과 우리 민초들의 삶, 그 모든 것들이 함축돼서 하나로 연결된 형상이다.

천 년 세월 동안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사람이 이 부처를 친견했을 것이다.

의상이나 도선, 사명대사도 마애여래 앞에 섰을까 지극한 정성이, 스쳐 지나는 객의 발길도 오랫동안 붙든다.

마애불은 태양을 향해 동남쪽으로 서 있어 해돋이 빛을 온몸으로 받아 낸다. 북동쪽으로는 구미 공단, 금오지와 시가지가 내려다보인다. 가을 들판을 남쪽으로 휘돌아나가는 낙동강 구비도 보인다.

마애불의 전체적인 보존상태는 비교적 좋은 편이다.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없는 산 정상부에 위치하기 때문일 것이다.

전면의 평평한 공터에는 현재 주춧돌이 남아있고 흩어진 기와 조각들, 암벽에는 연결구조의 흔적도 보인다.

1618년(광해군10) 간행된 경상도 선산도호부 읍지 일선지(一善誌)에 ‘금오산 제일 높은 곳 아래 보봉사라는 작은 절이 있었으니 남동쪽으로 수 백리를 바라볼 수 있다’(金烏山 最上峰下有有小刹是也.通望南東數百里)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래서 그 자리에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원래는 석불인데 그 위에 금박을 두텁게 입힌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362호 약사암 석조여래좌상.
◆약사암 불상

마애불이 새겨진 암벽에서 남쪽으로 조금 더 거친 비탈길을 올라가면 약사암이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김천 직지사의 말사이다. 신라 눌지왕(417∼457) 때 아도화상이 창건하였으며 이후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조선 중기 사명대사 유정이 금오산성을 쌓으면서 중창한 바 있다. 1990년대에 중창하며 법당 왼쪽에 요사채를 지었고, 그 앞 봉우리 바위 위에 종각을 새로 지어 주변 산세와도 어우러진 풍광을 보여 준다.

거대한 암벽 끝에 불은 제비집처럼 이 작은 절집은 온몸으로 시간의 질곡을 버텨 온 결과물이다.

중국 유학서 돌아온 의상대사도 이 산에 들어와 수행했다.

각고의 정진 끝에 깨달은 바 있어 앉은 자리에 작은 절집하나 짓고 하산했는데 그곳이 벼랑 끝에 서 있는 이 암자이다.

이곳 법당 안에는 신라 말 혹은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불상이 있다.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362호인 약사암 석조여래좌상은 원래 석불인데 그 위에 금박을 두텁게 입혔다.

수도산 수도암의 석불좌상(보물 제296호), 직지사 약사전의 석불(보물 제319호)과 함께 삼 형제 부처라고 불린다. 세 불상이 동시에 빛을 뿜는 방광(放光)을 하였다 해서 붙여진 별칭이다.

약사암 설명문에는 한 석불이 하품하면 다른 두 석불은 따라서 재채기를 한다는 전설이 있다고 적혀 있다.

약사암 법당 왼쪽에는 요사채가 있고, 그 앞 봉우리 바위 위에 종각을 지어 주변 산세와 어우러진 풍광을 보여 준다.
산새 소리가 적막을 깨운다. 가을 해는 짧아서 벌써 석양이다. 암벽 틈에도 단풍이 저녁노을처럼 붉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어둠이 산자락을 덮기 시작한다. 하산은 야간산행이다.

조선 초 무학대사가 이 산을 보고 ‘왕의 기가 서려 있다’고 했다니 기운 한 번 느껴볼 요량으로 미적거렸다.

마애불이 자리 잡은 산을 떠나 내려가지만 벼랑 끝에 새겨진 부처는 절망 끝에 선 중생을 언제나 다독인다.

마애불의 경우 암벽에 조각돼 있기 때문에 조성 당시의 바로 그 장소에서 이동했을 가능성은 없다.

천년세월 풍파 속에 절은 사라져도 묵묵히 원래의 자리를 지키며 오늘도 내일도 서 있을 것이다.

글·사진= 박순국 언론인

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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