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선 박선영



길을 가다 말고 우뚝 멈춰 섰다. 황금빛 물결이 시선을 붙든 탓이었다.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더니 파도가 일듯 바람에 밀려온 빛에 나는 갇혀버렸다. 언젠가 어디선가 보았던 풍경과 비슷했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리고 꽹과리와 북소리도 둥둥~ 울렸다. 그 소리에 집중하기 위해 나는 눈을 감았다. 따사로운 햇볕 속에 그렇게 얼마나 서 있었을까.

“선영씨, 뭐 하세요? 빨리 와요.” 하는 소리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그 어디에도 황금물결은 없었다. 단지 푸른 대숲만이 있을 뿐이었다. 대숲에서 이는 바람 소리가 바스락바스락 들려왔다. 나를 부르며 손짓하던 회원은 저만치서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에게 뛰어갔더니 날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대나무꽃을 본 거 같아서요.”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은 대나무꽃을 본 적이 없다며 그런 꽃도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렇다고 하자 그녀는 대나무꽃이 궁금하다며 찾아보겠다고 했다.

글공부를 하고 있는 문학회에서 문학 탐방여행으로 경주에 간다고 했을 때 나는 내심 반가웠다. 불국사나 석굴암은 어머니와 인연이 깊어 언제라도 가고 싶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국사 석굴암보다 천마총 대릉원 가는 길목에서 나는 어머니를 만났다. 대나무 산책로를 걷다 말고 대나무를 올려다본 순간 그곳에 어머니가 있었다. 대나무밭에서 소원을 빌며 치성을 드리고 있는 젊은 여인, 탐스러운 머리를 매끈하게 빗어 쪽을 찌고 낭자에 옥비녀를 꽂은 어머니가 날 향해 웃고 있었다.

백여 호가 넘는 집성촌에서 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종가였던 우리 집은 울타리를 대나무로 엮었다. 집 뒤에 대밭이 있어 대나무가 흔했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부터 대나무를 보고 자란 우리에게 대나무밭은 놀이터였다.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울기 좋은 곳이었다. 종부의 시름을 어머니는 대나무밭에 풀어놓곤 했다.

어느 핸가 마을에 경사가 났다. 바로 우리 집 대나무밭에 대나무꽃이 핀 것이다. 온 마을이 시끌벅적했다. 윗동네 아랫동네는 물론이고 타촌에서까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꽹과리와 북을 치며 흥겨워했다. 그때 마을에서 제일 높은 어른인 동배 할배가 근엄하게 입을 열었다.

“이 대나무꽃은 상서로운 징조일세. 나라에 큰일이 있었을 때는 꼭 꽃이 피었다네.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물리쳤을 때에도, 우리나라가 해방되던 해에도 피었어. 이번에도 좋은 일이 있으려나 본데….” 할배 말에 친척들 시선이 아버지, 어머니에게로 쏠렸다. 그들의 눈빛에는 종가종손에 대한 기대가 서려 있었다.

어머니는 종가살림을 지혜롭게 잘 꾸려나갔다. 동네 애경사에도 어머니가 빠지면 안 될 만큼 어머니는 과방(果房)을 잘 관리했다. 배고픈 시절이라 과방에서 인심 난다고, 모든 사람에게 음식을 잘 나눠주는 역할이 중요했다. 바느질 솜씨도 야무져 어른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종가의 대를 이를 아들을 낳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종가에서 제례나 시제를 지낼 때 반드시 종가의 자손이 있어야 했다. 그럴 때마다 죄인이 된 어머니는 대나무밭으로 숨었다.

대나무는 영험한 나무이기도 하지만 생활에도 쓸모가 많았다. 종가에는 손님이 많았다. 손님 접대용으로 죽순은 톡톡한 역할을 했다. 어머니는 술 빚는 솜씨도 뛰어났다. 솔잎을 넣고 지에밥을 쪄 식힌 다음 누룩을 섞어 술 항아리에 담았다. 항아리 위에는 대나무 잎을 덮었다. 이틀간 아랫목에 두었다가 대나무밭에 저장했다. 쌀알이 동동 뜬 달착지근한 막걸리를 아버지는 아주 좋아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남은 막걸리를 되들잇병에 담고 댓잎으로 병마개를 해 놓아두면 발효 식초가 되었다. 미나리 초무침은 까다로운 할머니까지도 웃게 하였다. 된장, 고추장, 김치, 장 항아리에도 댓잎을 덮었다. 그러면 골마지가 끼지 않는다고 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라 보리밥을 해서 대나무 바구니에 담아 부엌 천장에 매달아 놓기도 했다.

아버지는 낚시를 좋아해 대나무를 베어 낚싯대를 만들었다. 물고기 담는 그릇에도 댓잎을 넣으면 비린내가 사라졌다. 대나무는 쓰이지 않는 곳이 없었다. 여름에는 돗자리를 만들어 깔았고 대나무로 만든 평상은 가족의 놀이터였다. 겨울에는 대나무를 쪼개 태극기 창호지를 붙여 태극 연을 만들었다. 방천에 나가 아랫바람이 불면 연을 높이 날려 소원을 빌기도 했다. 어머니와 우리 가족에게 대나무밭은 삶의 원천 같은 곳이었다.

어머니는 당신의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집안 어른들의 성화에 결국 작은댁을 들여야 했다. 어머니는 손수 짠 베로 이불을 만들고 베개를 마련해 신방을 차려주었다. 아버지를 그 방에 들여보내고 어머니는 결연히 대나무밭에 섰다. 몸을 정갈히 하고 머리를 곱게 빗어 옥빛 비녀를 꽂았다. 대쪽같이 퍼런 어머니의 모습을 만월이 지켜보았다. 어머니는 그런 달을 삼켰다. 흡월정(吸月精)을 하기 위해서였다.

흡월정이란 달의 기운을 몸속으로 빨아들이는 걸 말한다. 동지섣달 닷새 동안 달이 만삭처럼 부풀어 오를 때 갓 떠오르는 달을 맞바라보고 선다.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마셔 우주의 음기를 생성해 주는 달을 삼키는 것이다. 여인이 달의 음기를 채우면 그 힘으로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믿었다.

어머니가 흡월정을 할 때는 바람마저 숨을 죽였다. 강한 기를 모아야 했기에 어머니는 후들거리며 대나무를 붙잡았다. 곧 쓰러질 것 같으면서도 강한 의지로 곧추섰다. 다음날은 어김없이 불국사를 찾았다. 법당에 들어가 삼천 배를 하고 석굴암을 찾아 마음을 닦았다. 어머니의 간절함은 무서울 정도로 강했다. 가슴에 박힌 옹이를 빼기 위한 몸부림, 어머니의 일념은 온통 한곳에 꽂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꿈을 꾸었다. 또렷한 보름달이 대나무밭을 대낮처럼 환하게 비추는 꿈이었다. 어머니는 얼른 치마를 벌려 달을 받아 안았다. 어머니의 간절함이 하늘에 닿았던지 어머니는 일 년 뒤 아들을 낳았다. 대나무꽃이 핀 건 우연이었지만, 어머니가 보름달을 안은 건 우연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오래 되었지만 대나무를 볼 때마다 나는 어머니를 느낀다. 천마총 대릉원 대나무 길에서 만난 어머니는 그 후 오래도록 내 안에 살아 있었다.



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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