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 다문화 백일장 수필부문 장원 중국 출신 녕빙씨.
▲ 2019 다문화 백일장 수필부문 장원 중국 출신 녕빙씨.
제가 결혼을 하고, 남편을 따라 한국에 온 지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2008년 8월12일 인천공항을 통해 한국에 첫 발을 내디딜 때 제겐 두려움과 낯섬, 외로움이 남편의 존재만으로 채워지거나 가려지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은 ‘고향’이란 것과 ‘삶’이란 것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고 살았었습니다.



항상 곁에 있던 부모님과 친척들, 그리고 친구들이 제게 그리움이란 단어로 몇 시간 만에 눈물처럼 흘러내릴 거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렇게 한국생활은 시작되었고, 낯선 환경에 적응한다는 것 보다는 그냥 먹고 자고 멍하니 그리움을 키우는 것만이 제게 유일한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었습니다.



분명 살아서 숨은 쉬고 있는데, 전혀 즐겁거나 행복하지 않은 ‘배부른 돼지’가 되어가는 그런 기분이 제가 한국에서 느낀 제 존재의 무게였습니다.



중국에선 나름 바쁘게 살고 즐겁게 살았던 것 같은데, 남편만 보고 온 이곳에서 전 정말 남편만 바라보는 해바라기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남편의 출근과 퇴근시간만 재촉하며 남편의 사회생활을 간섭하기 시작했고, 퇴근시간 이후의 모든 시간을 관리하고 제약했었습니다.



남편을 제어하고 통제하면서 저는 제가 살아있고 힘이 있는 존재라는 걸 확인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남편은 한국에 있으면서도 친구를 만날 수 없었고, 회식때는 밤 9시전 귀가하고, 주말 출장은 애를 안고 따라가며 확인까지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 남편도 저로 인해 많이 힘들었을 겁니다. 그래도 그 당시에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이곳에서 바라볼 수 있는 건 남편뿐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살고, 남편이 숨을 쉬려면 무엇보다 제가 변해야만 했습니다. 중국땅에 놓고 온 걸 그리워하며 이렇게 주저앉아 있기엔, 이곳에서 숨쉬며 살아야 할 시간이 너무 길어 보였습니다.



한국에 온 뒤 그 동안 접어두었던 ‘생각’이란 걸 참 많이도 해봤습니다. 내가 이곳에서 살기 위해 제일 큰 문제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니, 그것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말’이었습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곳에서 남편의 도움으로 인터넷을 뒤져 한글을 가르쳐 주는 문화센터를 어렵게 찾았습니다.



처음엔 버스를 탈 줄 몰라 1시간 거리를 걸어 다니며 한글을 배웠습니다.



너무 힘들고 지루한 시간이었습니다. 어둠에 갇힌 듯 한글은 제 뇌를 스쳐 지나갔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으니 지루한 노력의 시간은 계속 되었습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입이 열리고 글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버스도 물어서 탈 수 있게 되고, 두려움으로 멀리했던 문명의 혜택도 조금씩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아마도 조금씩 새로운 것에 대한 갈증이 꿈틀거리며 제게 다가오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한 걸음 걸으면 다른 모퉁이가 보이고, 한 걸음 더 걸으면 조금 더 넓은 길이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역시 움직이고, 노력하고, 만나야 해결되는 것이 사람이 어울려 사는 사회이고, 자리를 옮겼어도 그 삶의 진리는 그리 큰 차이를 두지 않는다는 것도 새삼 다시 느끼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다문화지원정책을 통해 방송통신대학교 3학년에 재학 중입니다.



학교에선 임원으로 활동하며 많은 분들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나름대로 인정도 받고 있습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방송통신대학은 젊은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할머니,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익숙한 나이대의 어르신들이 제 선배고 동기고 후배입니다.



30대의 학우들을 보면 처음엔 너무 반갑고 기뻐 먼저 다가가곤 했습니다. 하지만 곧 스치는 인연으로 남더군요.



젊은 사람을 보면 반갑고 좋은데, 스치듯 머물다 간 학우들은 현재의 어려움에 포기를 한다고 하더군요.



사는 것이 힘들어 학업을 멈추거나 꿈을 뒤로 미루는 분들을 보면 마음이 참 아프고 안타까웠습니다.



그때마다 보이는 흰머리의 아픈 곳 많은 동기들이 제게 손을 내밀어 당겨주고 밀어주고 계십니다.



저분들은 써먹지도 못할 졸업장을 갖기 위해서 저렇게 열정을 쏟으시는데, 제가 여기서 포기하면 부끄러울 것 같았습니다.



수많은 이유가 핑계가 되어 스스로를 위로하고 그 위로에 속을 수 있겠지만, 전 아직 그리 힘들진 않습니다.



젊어서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시고, 이젠 세상의 뒤편으로 물러나신 분들이지만, 어깨에 어울리지도 않는 책가방을 메시고 학교를 찾아 ‘선배님’이라고 부르며 웃어주시는 모습에 세상에서 제일 큰 에너지를 얻고 있습니다.



그 분들은 나이가 들어 이 시간이 오기를 기다리신 듯, 늙음과 나이듦에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힘들게 살아온 과거의 모습을 잊고, 어렸을 적 메고 싶었던 책가방을 메고 학생이 된 기쁨에 그분들의 신분증은 지갑 젤 앞쪽에 학생증이 자랑스럽게 대신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분들을 통해서 꾸게 된 꿈은 그리 크지도 대단하지도 않습니다.



제 주위의 사람들이 저를 보며 에너지를 얻고 저의 삶을 통해 꿈을 꿀 수 있는 조각같은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전 충분히 이곳에서 필요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도 부족한 제가 완성하지 못한 꿈의 조각을 하나 더 찾기 위해서 한걸음 더 움직이고 있습니다.



지금 이런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도 남편을 따라 새로운 곳으로 온 저에게는 즐거운 기회이기도 합니다.



중국에 머물러 있었다면 갖지 못했을 기회와 삶에 대한 의미를 이곳에서 다시 느끼고 배워가고 있습니다.



꿈이란 의미를 잊고 살았던 과거에는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도전에 대한 기대로 오늘 하루하루가 벅차고 기쁩니다.



비록 그 꿈의 조각을 모두 완성하지 못할지라도, 꿈 조각을 모으는 퍼즐게임을 멈추지는 않을 겁니다.



어디 쓸 곳도 없는 졸업장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많은 분들을 보면서 꿈은 꾸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그 가치는 충분하다는 걸 낮은 시선으로 배워봅니다.



저는 이주여성들에게 도움을 주는 멘토가 되기 위해 포기하지 않는 꿈을 꿀 것입니다.



직업을 통해 자기성취를 하고 멘토가 되어 그들에게 꿈을 꿀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찾아주고 싶습니다.



누군가의 엄마로, 아내로 자기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그런 여성들과 함께 한국에서 열심히 살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현수 기자 khso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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