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2019 수필대전 취한대(翠寒臺)

입선 배해주

성리학의 갈라파고스를 찾았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가 결정된 소수서원이다. 장마가 꼬리를 감추고 대지가 고열에 지쳐 비지땀을 흘리는 8월 첫날이다. 예전에 주마간산으로 들른 곳이지만 세계유산으로 격이 높아지고는 처음이다. 그래서일까? 발걸음에 설렘이 실려 있다. 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은 이곳 출신으로 성리학의 시조인 안향 선생의 사표를 세워 위패를 봉안하고, 다음 해에는 학사를 건립하여 백운동서원을 창건하였다. 그 후 1550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재임하면서 명종에게 건의하여 소수서원이란 사액을 받았다.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공인된 사립 고등교육기관이다. 성리학의 큰 산맥인 퇴계 선생의 많은 제자가 이곳 출신이다. 그리고 4천여 명의 유생들을 배출한 성리학의 보고다. 안동의 도산서원 등 9개 서원이 14번째로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그중에 소수서원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입구에 들어서자 하늘로 솟은 학자 수림이 먼저 세상의 더위에 지친 길손을 반긴다. 한 줄기 바람이 전하는 솔향은 선비의 기개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서원에는 안향 선생의 초상이 국보 제1111호 지정되어 있고, 보물 제1403호인 강학당을 비롯한 보물 4점, 명종의 어필인 소수서원 현판 등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5점이 있다. 예쁘면서도 마음씨까지 고운 여인처럼 서원의 품격에다가 문화재로서의 가치까지 품고 있는 귀한 곳이다. 서원 안에는 강학당, 장서각, 전사청, 영정각, 직방재와 일신재, 학구재와 지락재, 경렴정, 취한대 등 오밀조밀 어깨를 부딪치듯 배치된 전각이 정겹다. 건물 하나하나가 나름의 의미와 상징성이 있지만, 지남철이 당기듯 나의 시선을 머물게 한 것이 있다. 바로 취한대다. 서원 경내가 아닌 죽계 건너에 혼자 다소곳이 자리 잡았다. 서원 쪽에서 보면 잔잔히 흐르는 죽계에 거울처럼 투영되어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취한대는 학문에 심취한 유생들이 잠시 여유를 즐기던 곳이다. 취한(翠寒)은 연화산의 푸른 기운과 반변천의 상류인 죽계의 맑고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이다. 퇴계 선생이 옛 송취한계(松翠寒溪)에서 비취 취(翠)와 차가울 한(寒)에서 따서 지은 것이다.

취한대는 8개의 둥근 기둥 위에 팔작지붕이 주변의 풍경과 어울리며 편안하게 앉아 있다. 정면 3칸에 측면 1칸 반 겹집의 목재 건물로 단청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본연의 모습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고 있어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어 좋다. 바로 화장하지 않은 민얼굴의 순수함이 취한대의 백미가 아닐까? 서원 경내 쪽에서 보면 단아함에 서기가 서려 있는 듯하고, 취한대에 앉아 죽계 건너를 보면 금방 시 한 수가 떠올라질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마루에는 여성 몇 분이 앉아 담소를 즐기고 있다. 간간이 번지는 그들의 미소와 여유로움에서 지난날의 유생들을 보는 듯하다. 그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나도 발걸음을 조용히 하며 나름의 여유를 즐긴다. 송림에서는 매미가 여름을 노래하고, 연화산에서는 이름 모를 풀벌레가 더위를 쫓는다. 이에 질세라 죽계의 맑은 물은 조용히 시어를 토해낸다. 순간 폭염도 잠시 잊었다. 분위기가 주는 귀한 선물이다. 잠시 눈을 감으면 500여 년 전으로 돌아가 나도 유생이 되어 있는 듯 환상에 빠진다. 주변 환경이 사람을 만들어 간다는데 이렇듯 고즈넉한 곳에서 글을 읽고 시를 쓰며 학문을 닦았던 유생들은 어찌 충과 효가 깊지 않았으랴. 맹모삼천지교의 깊은 뜻을 이곳에서 다시 음미해 본다.

그곳이 어디냐에 따라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폭포수 아래에 서면 떨어지는 물처럼 가슴이 요동을 치고, 높은 산에 오르면 자신도 모르게 높은 기개가 가슴에 안겨 온다. 망망대해로 나가면 아무리 큰 배에 몸을 실어도 나뭇잎같이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고. 또한 현란한 조명에 싸이키 음악이 울리는 클럽에서는 평온을 찾을 수 없지만, 풍경 소리 들리는 가람에서 부처님 앞에 엎드리며 방하착(放下着)은 덤으로 얻어진다. 성리학의 서기가 서린 취한대에서 눈으로는 송림의 기개와 민얼굴의 순수를 느낄 수 있고, 조용히 흐르는 죽계의 물소리는 소음에 찌든 귀를 정화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땅과 하늘, 숲과 물이 맑은 곳이다. 맑은 곳에서 맑은 마음이 생기고, 맑은 언어와 맑은 행동이 발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곳은 지그시 눈만 감아도 자연의 본성까지도 느낄 수 있는 학문의 전당이다, 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이곳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충과 효를 실천했던 유생들을 생각하고 몇 날이라도 살아야겠다. 이것이 취한대가 주는 교훈이다. 매미들의 합창을 뒤로하고 조용히 귀를 모으면 죽계의 물소리는 더 청아해진다. 나뭇잎 하나가 물 위로 사뿐히 내려앉아 수류거(隨流去) 한다. 참으로 사위가 맑은 곳이다. 세상이 답답하고 삭막할 때, 조용한 취한대에 앉아 자신을 한번 돌아보고 충과 효를 되새김질해 보는 것도 오늘을 살아가는 맛이자 지혜이리라.

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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