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발행일 2019-11-17 14:47:54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11월 / 나희덕

바람은 마지막 잎새마저 뜯어 달아난다/ 그러나 세상에 남겨진 자비에 대하여/ 나무는 눈물 흘리며 감사한다// 길가의 풀들을 더럽히며 빗줄기가 지나간다/ 희미한 햇살이라도 잠시 들면/ 거리마다 풀들이 상처를 널어 말리고 있다// 낮도 저녁도 아닌 시간에,/ 가을도 겨울도 아닌 계절에,/ 모든 것은 예고에 불과한 고통일 뿐//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있지만/ 모든 것은 겨울을 이길 만한 눈동자들이다

- 시집『뿌리에게』(창비,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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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하거나 내세울 게 변변찮던 시절, 이 땅의 자랑거리 하나가 사계절이 뚜렷하다는 기후조건이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겠으나 그렇다고 각 계절이 공평하게 석 달씩 나눠 갖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봄과 가을은 여름과 겨울보다 짧아서 더위와 추위를 더 오랫동안 견뎌야 했다. 11월은 우리의 관념 속에서 아직 가을이 분명한데, 반팔 옷을 벗고서 경쾌한 가을 옷으로 갈아입을 여가도 별로 없이 두터운 한겨울 옷들을 찾아 입는다. 하긴 입동 지난지도 일주일이 지났고 기온은 급강하하여 보일러를 돌리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다.

또 첫눈도 내렸다지 않은가. 그럼에도 단풍은 여전히 목하 절정이고 낙엽 바스락거리는 이 계절을 가을 말고 무어라 부르랴. 냉큼 겨울이라 서둘러 규정하기가 내키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시에서처럼 11월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아 ‘가을도 겨울도 아닌 계절’이라 함이 적확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가을에서 겨울로 바뀌는 ‘환절기’가 아니라, 가을과 겨울 사이의 ‘간절기’로 말이다. 황지우 시인은 ‘11월엔 생이 마구 가렵다’고 했다. 11월의 나무 역시 그 그림자 위에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

‘바람은 마지막 잎새마저 뜯어 달아’나는 마당에 우리의 생도 가렵지 않을 리 없다.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잡은 아이의 손처럼, 이별을 앞두고 맞잡은 연인의 손처럼 그렇게 가을은 깊고 짙어지다가 어느 순간 손을 탁 놓아버릴 것 같은 불안 때문은 아닐까.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떠오르며 ‘모든 것은 예고에 불과한 고통’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정든 한숨과 환멸의 힘만으로 건너야 할 가을과 겨울 사이의 계절이다.

11월엔 상여금을 챙겨주는 회사도 없고 그 흔한 ‘노는 날’도 없다. 무엇을 위해 살고 있으며, 얻은 건 무엇이고 또 잃은 건 무언지, 추정 대차대조표와 손익계산서는 난색이다. 수능시험으로 삶의 한파를 예비하는 시련을 안겨주고, 우리는 겨울을 견디기 위해 김장을 서두른다. 그리고 견뎌야할 것은 계절만이 아니다. 큰아이는 먼 나라에서 여전히 그 모양이고 작은애는 지방의 작은 공장을 다니며 근근이 살아가지만 큰 불만은 없다. 불황이니 불경기니 예전만 못하다는 소리를 오랫동안 들어왔으나 늘 그런가보다 했다.

배 곪지 않고 살아가면 다행이라 생각한다. 높은 아파트 숲을 걷는데 번질번질한 자동차들이 나를 밀어내지만 치어다보지 않는다. 인디언 아라파호족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했다. 봄날은 꼭 와야 하고, 또 올 테지만 ‘겨울을 이길만한 눈동자’의 수정체가 가장 빛나야 할 시기의 푸른빛은 어디에서 오겠는지. 우리 모두 저 나무들처럼 ‘세상에 남겨진 자비에 대하여 눈물 흘리며 감사’하면서 ‘겨울을 이길만한 눈동자들’로 초롱초롱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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