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령성월/ 김상훈

위령성월 11월입니다/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달입니다/ 살아있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달입니다/ 내 스스로의 죽음에 대해서도 묵상하는 달입니다// 깊은 가을/ 낙엽들은 바람에 흩날리고/ 실과들은 모두 뿌리로 가 앉습니다// 기몰을 생각게 하는 시간입니다/ 은현을 생각게 하는 시간입니다/ 생멸을 생각게 하는 시간입니다/ 시종을 생각게 하는 시간입니다// 순심의 깊이가 더욱 깊어지고/ 순심의 넓이가 더욱 넓어지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구원의 시간입니다.

- 시집『그때 그 비빗새 그립다』(세종출판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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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남산동 천주교 대구대교구 성직자묘지 입구 기둥 좌우에는 라틴어로 ‘오늘은 나에게(Hodie mihi)’, ‘내일은 너에게(Cras tibi)’라 새겨져 있다. 죽음은 멀리 있지 않고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는 뜻의 경구이다. 죽은 성직자들이 살아있는 자에게 말하는 이 경구를 떠올리면 날마다 새로이 부여받는 ‘오늘 하루’가 그야말로 신비한 은총의 시간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으며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먼저 닥쳐올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 말씀은 죽은 자와 산 자 모두의 구원을 위한 기도이기도 하다.

위령성월은 가톨릭교회에서 죽은 이들의 영혼을 기억하며 기도함과 동시에 ‘살아있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내 스스로의 죽음에 대해서도 묵상’하는 달이다. 세상을 떠난 부모형제, 이웃들은 물론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영혼들의 안식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 죽음을 경건하게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성숙한 삶을 영위하기가 어렵다. 생로병사라는 상투적이고 도식적인 이해가 아니라, 구체적인 죽음에 대한 묵상과 현재의 삶에 대한 관조 없이는 우린 그저 흘러가는 삶을 살다가 대책 없는 죽음을 맞이하기 십상이다.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 자연스레 사후 세계에 대하여 묵상하게 되고, 이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삶을 성찰토록 한다. 죽음 뒤에 절대자를 만나는 순간,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전 생애가 완전히 발가벗겨지리란 것을 예감한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파노라마처럼 적나라하게 되돌아보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회개이며 심판의 시작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때 자신의 양심이 평안하면 죽음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심판 앞에서 떳떳하고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꼭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도 이 조락의 계절,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을 보노라면 사람의 생애도 저와 같다는 생각이 스치면서 겸허히 신의 자비를 청하게 된다. 우리의 전통풍습에도 11월은 음력 상달로 5대 이상의 조상 산소에 제를 올린다. 11월엔 어느 문중이나 선산의 시제 모시기에 바쁘다. 올해의 시제는 아마 지난주에 거의 종료가 되었을 것이다. 단풍도 빛이 바래어간다. 산과 숲이 물들고 낙엽이 발아래 바스락거릴 때 자신을 포함해 삼라만상의 ‘기몰’과 ‘생멸’과 ‘시종‘을 생각하는 것이다.

성당에 가서 전대사도 드리고 문중 시제에도 참석해야 마땅하나 그러지 못했다. 은총과 구원의 시간을 준비한 시인에게서 영적 높이가 느껴짐을 보면서도 실천이 잘 안 된다. 시계든 반지든 몸에 무얼 붙이지 못하는 성격 탓에 서랍에 모셔둔 묵주반지부터 찾아 껴야겠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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