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락

발행일 2019-11-21 14:47:11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조락/ 이태수

낙엽 지는 바위에 주저앉아 귀 기울인다/ 속도를 낮췄다 높였다 하는 바람, 바람소리/ 시간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는다// 날줄과 씨줄, 수직과 수평으로/ 세상은 얽히고설켜 끝없이 돌리고 돈다// 짜이고 끌어당기고 밀어내고 떨어뜨리는 저 소리들// 땅바닥엔 개미떼가 길게 줄지어 기어간다/ 불현듯, 새 한 마리가 하늘로 솟구치고/ 허공에는 느리게 바퀴를 굴리는 구름마차// 바위에 바위처럼 앉아 한참 더 귀 기울이면/ 모든 소리들이 꿈결같이 희미하다// 아무 것도 잘 보이지 않는다/ 걸어온 길들을 발치에 벗어놓고 들여다본다/ 어느덧 해가 서산마루에 걸리고// 또 몇 잎, 나뭇잎들이 발등에 떨어져 내린다

- 시집 『침묵의 푸른 이랑』(민음사,2012)

가을타는 사람에게 조락이 마무리되어가는 이즈음은 싱숭생숭한 사색도 끝물이다. 꾸들꾸들했던 기분도 푹 가라앉아 조금씩 말라가고 있다. ‘가을은 혼자를 허락하는 계절’이라는 말이 있듯이 명상과 성찰에 빠져들기 좋은 계절이다. 실은 명상이라기보다는 잡념이고 성찰이기 보다는 번뇌에 가깝겠으나. 하지만 단풍이 절정일 때와 잎들이 조락하여 발치에 나뒹굴 때의 사색은 내용과 질에서 차이가 날 수 있다. 지금은 자연의 순환과정에 촘촘히 반응하는 이에게는 생각들이 더욱 깊어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절기상으로나 이미 겨울로 들어섰건만 쥐꼬리만큼의 가을이 아직 발등에 서성인다.

‘낙엽 지는 바위에 주저앉아’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는’ 시간에 귀 기울인다. 소리 소문 없이 ‘세상은 얽히고설켜 끝없이 돌리고 돈다.’ 주의를 집중시켜야 ‘짜이고 끌어당기고 밀어내고 떨어뜨리는 저 소리들’을 들을 수 있다. ‘한참 더 귀 기울이면’ 다시 ‘모든 소리들이 꿈결같이 희미하다.’ 불교에서 ‘관세음(觀世音)’이란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뜻이다. 바깥 소리가 자기 내면의 소리와 하나가 되도록 지극하게 귀를 기울이다보면 마침내 귀가 활짝 열린다고 했다. 그 열린 귀로 무엇을 듣고 깨달을 것인가. 무지와 무명에서 벗어나 자신이 하느님의 품 안에 있다는 사실과 삼라만상이 하느님의 현현이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느덧 해가 서산마루에 걸리’면서 미확인비행물체처럼 한 조각 뜬 구름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인생이란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이라고 테레사 수녀님이 말했다. 낙엽마저 다 져버린 조락의 계절을 보고서 새삼 무상을 느낀다.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부산스럽게 ‘개미떼가 길게 줄지어 기어’가고, ‘불현듯, 새 한 마리가 하늘로 솟구치’며 제 존재를 알리지만 발등에 떨어지는 낙엽은 또 어디로 가는가. 낙엽은 결국 뿌리로 돌아가고 우리의 삶도 낙엽처럼 지지 않는가. 방하착(放下着), 공수래공수거.

그럼에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면 마치 끝도 없는 무한궤도를 달리듯 속도감이 마비되고 만다. 자칫 대형 사고라도 치게 되면 기관차에 올라탄 사람뿐만 아니라 둘레의 수많은 사람이 다칠 수 있다. 우울과 절망으로 뼈가 시린 겨울을 온통 지새우기 전에 ‘감속’과 ‘비움’ 그리고 ‘양보’와 ‘겸허’를 배워야할 때이다. 조락의 계절, 대통령이든 야당 대표든, 어떤 정치인이든 세속적인 언사로 구질구질한 변명을 이어갈 게 아니라 좀 묵직하고 대범하게 대응할 수는 없는 걸까. 어차피 부처님 손바닥 안이고 하느님 품 안이고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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