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세상으로 나를 데리고 갈까. 소설 책을 잡고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책은 우리 가까이에서 한번쯤은 생각할 수 있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10대 시절과 직장, 가정 등을 주제로 저자들은 다양하게 풀어냈다. 인간의 이기심과 무지, 위선을 고발하기도 하고 빗나간 모정과 집착이 낳은 비극도 밀도 있게 그려내고 있다.





◆6만 시간

박현숙 지음/특별한서재/240쪽/1만2천300원

‘6만 시간’에는 많은 함축적 의미들이 담겨 있다. 그것들과 얽혀 있는 여러 이야기들이 그물망처럼 촘촘하게 짜여져 있어 마치 흥미로운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13살부터 19살까지의 청소년기를 어림잡아 계산한 시간이 바로 ‘6만 시간’이다. 저자는 10대의 ‘6만 시간’의 중요성에 대해 소설 곳곳에 보물찾기를 하듯 에피소드들을 이곳저곳에 숨겨 놓았다.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가치관이 형성되고 자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는 10대 시절, 가족과 친구 관계가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지 작가는 이야기를 통해 소상히 보여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에, 공부도 잘하고 잘생긴,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을 것 같은 ‘영준’이에게도 치명적인 결핍이 존재했다. 그로 인해 영준이는 삐뚤어진 관념에 사로잡혀 잘못된 길을 걷고 있었다. 그리고 초등학교 때부터 늘 왜 맞아야 하는지 따지지도 못하고 때리면 그냥 맞기만 하던 ‘서일’이에게 큰 깨달음을 주는 치킨집 아르바이트생 ‘짱구 형’. 등장인물들 간의 긴밀한 대화와 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6만 시간’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열쇠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나중에 나이가 들게 되면 학창시절로 돌아가고 싶을 것이라는 영어 선생님의 말을 기어코 믿지 않았다고 한다. 힘들고 아프고 숨통을 조이는 시절을 절대 그리워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말이다. 살아 보니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보다는 문득 ‘후회’가 밀려올 때가 있다고 고백했다. 이미 한 번 지나간 시간으로는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란다. 미움과 원망만을 끌어안고 사느라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이 후회로 남는다고 했다.



◆로메리고 주식회사

최영 지음/광화문글방/312쪽/1만3천 원

이 책은 오랜 사법시험 공부에서 실패하고 손해사정 법인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주인공이 잇달아 겪는 기이한 이야기를 통해 진실의 상대성과 인간의 동물적 이기심을 다룬다.

제목은 주인공이 다니는 손해사정 법인 이름이다. 입사 초반 주인공은 공원 자전거 사고를 조사하다 목격자 중 한 명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이 목격자가 맞은편 오피스텔을 향해 기마 자세를 취하자 유리창이 깨지면서 사람이 다친 것이다.

그러나 이 장면이 의도적인 ‘테러’인지, 우연한 ‘사고’인지 확신할 수 없다. 테러라면 초능력인 ‘장풍’을 사용한 것인데,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공교롭게도 피해자는 신원을 숨기고 활동한 국가정보원 직원이다. 언론에서는 갖가지 추측과 억측이 나오고, 결국 북한 최신 무기에 의한 테러라는 분석이 힘을 얻는다.

사고가 난 오피스텔에는 주인공의 여자친구가 산다. 3년간 사귀었지만, 여자친구는 권태를 느끼는 듯 주인공에게 애정이나 관심을 거의 주지 않는다. 여자친구 집을 드나들다 '장풍'을 사용할지도 모르는 목격자와 자주 마주치게 된 주인공은 오피스텔 테러와 공원 자전거 사고에서 공통점을 찾는다. 모두 이 목격자가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증거들을 근거로 주인공은 목격자를 ‘장풍 테러범’으로 확신하고 다그친다. 목격자는 정체가 밝혀지자 여자친구를 해치겠다고 위협한다. 그리고 지난번 테러는 ‘미필적 고의’였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작가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인간의 이기심과 무지, 위선을 고발하고 진실의 상대성을 탐구한다. 순수문학이지만 작가는 '장풍'이라는 판타지 소재를 등장시켜 고전적인 서사 구조를 해체한다.

이야기는 현실과 초현실을 오가다 하나의 출구에서 합쳐진다. 이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할 것 같은 기이하고 해괴한 일이 버젓이 벌어지는 우리 사회 현실에 대한 풍자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러한 초현실적인 요소에 집중시키면서 인간의 이기심뿐 아니라 언제부터인가 문학에서 주요하게 다뤄져 온 ‘사적 제재’ 문제까지도 정면에서 다룬다.



◆너도 곧 쉬게 될 거야

비프케 로렌츠 지음/고요한숨/472쪽/1만4천 원

심리 묘사에 집중한 독일 미스터리 스릴러다. 독일에서 인기 작가로 부상한 여성 스릴러 저자는 빗나간 모정과 집착이 낳은 비극을 밀도 있게 그려낸다.

이 소설은 출산을 앞두고 함께 행복한 미래를 그리던 레나와 다니엘 부부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레나는 커다란 고통과 죄책감, 외로움 속에서 딸 엠마를 출산한다. 육아에 지친 레나가 잠깐 눈을 붙인 사이 누군가 집에 침입해 엠마를 납치한다. 납치범이 경고장에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말하면 네 딸은 죽어”라고 적혀있다.

레나는 납치범이 딸을 해칠까 경찰에 신고도 못한 채 혼자 엠마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납치범의 자취에 접근할 때마다 점점 더 강도가 거세어지는 경고와 함께 딸의 사진이 날아들고, 주위 사람들이 하나둘 죽거나 혹은 사라진다. 마침내 레나가 찾아낸 단서는 모든 죽음들을 연결하는 섬뜩한 수수께끼로 이어진다.

저자 비프케 로렌츠는 엇나간 모정과 집착이 낳은 비극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익숙한 일상 속의 균열을 잘 포착하고 있는 이 책은 독자들로 하여금 공감과 불안, 분노 등의 감정을 공유한다.

소설은 평범한 인물이 등장하기에 더욱 섬뜩하다.

자기 아이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레나에게만 전가하는 슈스터 부부, 재산에 대한 탐욕 때문에 딸을 방기하는 레베카, 레베카의 과오를 알면서도 마음이 약해 입을 다묾으로써 공모자가 되는 마르틴, 어른들의 사정 속에서 피폐해지는 다니엘의 딸 조시 등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철저한 악인이라기보다는 우리 일상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병들고 ‘꼬인’ 사람들이다.

저자는 “칼을 든 연쇄살인범보다 우리의 현실을 구성하는 사람들이 스릴러에서는 더 매력적인 소재다”며 “정말 무서운 것은 연쇄살인마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지옥인 우리 내면의 꿈틀거림이다”고 했다.



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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